2013년 4월 19일 금요일

어부사(漁父辭) -버림받은 자의 자학

롱아일랜드 존스 비치에 방치된 울타리. 여름 피서철이 끝나면 직장을 잃거나 이혼한 사람들이 자주 찾으면서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버린다는 것을 깨닫는 곳이기도 하다.

漁父辭(어부사)

屈原旣放(굴원기방) 
굴원이 이윽고 쫓겨나

游於江潭 行吟澤畔(유어강담 행음택반)
강과 물가에서 노닐며 연못 둔덕에서 시나 읊조리고 다니는데

顔色樵悴 形容枯槁(안색초췌 형용고고)
안색은 초췌하고 모습이 수척하였다.

漁父見而問之曰(어부견이문지왈)
어부가 그를 보고 물어 말하기를

子非三閭大夫與 何故至於斯(자비삼려대부여 하고지어사)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屈原 曰(굴원 왈)
굴원이 말하기를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거세개탁 아독청, 중인개취 아독성, 시이견방)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 홀로 맑고, 모든 사람들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그래서 추방을 당했소

漁父 曰(어부 왈)
어부가 말하기를

聖人 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성인 불응체어물 이능여세추이)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과 함께 변하여 따라 간다고 합니다.

世人皆濁 何不淈其泥而揚其波(세인개탁 하불굴기니 이양기파)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왜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衆人皆醉 何不飽其糟而歠其醨(중인개취 하불포기조 이철기리)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거든 왜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를 마시지 않으십니까?

何故深思高擧 自今放爲(하고심사고거 자금방위)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게 하십니까?

屈原 曰(굴원 왈)
굴원이 말하기를

吾聞之, 新沐者 必彈冠, 新浴者 必振衣(오문지, 신목자 필탄관, 신욕자 필진의)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했소.

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안능이신지찰찰 수물지문문자호)
어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녕부상류 장어강어지복중)
차라리 상강에 가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안능이호호지백 이몽세속지진애호)
어찌 희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와 티끌을 뒤집어쓸 수 있겠소?

漁父 莞爾而笑 鼓枻而去 乃歌曰(어부 완이이소 고설이거 내가왈)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뱃전을 두드리고 가면서 노래하기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遂去不復與言(수거불복여언)
마침내 떠나가 다시 함께 이야기 하지 못했다.

                                                                    <굴원; 기원전 340년-기원전 278년>

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일찍이 공자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면 역시 군자가 아닌가?”하고 말했을 때 자신의 아량이 넓다거나 x폼을 잡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흘려들으면 아무도 없는 벌판에 홀로 서서 처절하게 울부짖게 될지도 모를 거라는 치명적인(?) 충고였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 사람들 틈에 끼어 살기 마련이고, 세상 사람들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잘 살고 있다는 반증, 거꾸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잘못됐다거나 세상이 잘못된 것인 바, 그럴 경우에 겪는 외롭고 쓸쓸함과 심적 갈등은 이만 저만 큰 게 아니다. 그래도 화를 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군자 할아버지’라고 할만 하지 않은가?! 

세상이 잘못된 건 가? 내가 잘못된 건가? 공자의 200년쯤 후배인 굴원(屈原) 또한 공자의 충고를 흘려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던 것 같다. 초나라 왕족 출신으로 회왕의 좌도가 되어 내정과 외교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으나 그 때문에 다른 신하들의 시샘과 미움을 받았고, 회왕이 객사한 후 장남 경양왕이 즉위하고 회왕을 객사하게 만든 막내 자란이 영윤이 되자 그를 비난하다가 대부의 참언으로 추방을 당해 동정호 근처를 방랑하다가 돌덩이를 껴안고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 때의 심정을 읊은 저 유명한 ‘이소(離騷)’를 마무리 지으면서 “모든 게 다 끝났도다. 나라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고도(古都)를 마음에 품으리오?(已矣哉 國無人莫我知兮 又何懷乎故都)”하고 절규했던 것을 보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충격과 고통이 꽤나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어부사’ 속에서 세상살이에 대해 굴원과 논쟁을 벌이는 ‘어부’는 누군가? 흔히 “더러운 속세를 버린 은사(隱士)”쯤으로 해석하지만 천만의 말씀, 굴원의 또 다른 자아(自我)로 보는 게 옳다. 굴원이 자기가 쓴 글에 자기를 ‘나’라고 하지 않고 ‘굴원’이라고 객관화한 것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뚝 떨어져 살고 싶어 하는 자아’의 충돌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옳지만 세상이 글러먹어서 버림받았다”고 여기고 싶어 하는 자아와 “더러운 세상에서 혼자 깨끗한 척 하는 건 맨땅에 헤딩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또 다른 자아의 충돌을 그렸다는 말이다. 직장에서 모함을 받아 명퇴를 당했다거나 인종차별을 당해 목이 잘렸을 때 세상을 원망하다가도 “세상이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거 아닌가? 나야말로 실력이 없어서 그런 더러운 세상에서조차 밀려난 게 아니냐?”고 자학해본 사람들은 고개 끄덕이리라. 허구한 날 집구석에 틀어박혀 담배 연기 길게 내뿜을 때마다 제일 고통스러운 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더욱이 신세 처량하게 되자 친구들은 물론 처자식까지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을 감지했을 때의 열등감과 쓸쓸함과 모멸감이란!...‘국무인막아지혜(國無人莫我知兮)’를 골백번 되뇌어도 모자란다는 것을 절감하리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버리는 것, 내가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내가 나를 버리는 것임을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수신(修身)에 힘썼던 공자는 잘 알고 있었던 반면 쥐뿔도 없이 자존심만 강했던 굴원은 그걸 잘 알면서도 세상만 원망했기에 마음고생이 더 심했던 것 아닌가?!

댓글 1개:

  1. '어부사' 해석 인터넷 글들을 찾아보다 읽게되었습니다. 어부를 굴원의 또 다른 자아로 해석하는 부분이 흥미롭네요. 요즘 '행복, 깨닮음, 해탈, 서로 다름의 이해등'에 관심이 많았는데, 필자님의 글을 보고 또 다르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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