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 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1954년 '현대공론', 서정주; 1915년-2000년>
가장(家長)은 어떤 존재인가?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윤리가 굳건했던 시절에는 말 그대로 ‘집안[家]의 어른’이었으나 경제논리가 윤리를 지배하면서부터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소년소녀 가장’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실직 당한 4,50대 가장들이 심신이 유약해진 나머지 종종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가족 부양 부담감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얼마 전 부산에서는 후배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줬다가 떼인 30대 가장이 자신이 든 2억원짜리 생명보험을 타내 가족의 생계를 이을 목적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만년의 서정주 시인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등을 보며’는 매우 당당하게 서정주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로 꼽힌다. 문학사적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지만 일반 시 독자들의 ‘서정주 대표작’ 리스트에는 항상 상위에 오른다. 그 이유가 뭔가? 읽기에 쉬우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생활고에 시달린 가장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시인의 특출한 머리로 쓴 시가 아니라 시장통 사람들이 공감하는 가슴으로 쓴 시라는 말이다. 실제로 ‘무등을 보며’를 발표할 때의 서정주는 전남 광주 조선대 국문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나 대우가 형편없어 점심을 거를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그런 가난 속에서 시인은 청탁 받은 시 한편을 기술자처럼 써주고는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받아 막걸리 한 잔 걸쳤을 터, 그 때 바라보던 무등산의 갈맷빛 등성이가 눈이 부시게 푸르렀을 것이고, 처자식 먹여 살리는 게 주옥같은 시를 쓰는 것보다 천만 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맹물 마시고 배부른 척 하는 자기 최면을 걸면서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고 그 얇은 입술을 다시 한번 지그시 깨물었을 ‘가난한 가장’ 서정주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난한 시인은 그렇게 두 아들을 잘 키워 장남 승해는 미국 변호사가 됐고 차남 윤 또한 미국 의사가 됐다.
시는 혓바닥을 놀리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가슴을 울려 토해내는 삶의 소리, ‘무등을 보며’가 서정주의 대표작 아닌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것도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몸으로 쓴 시이기 때문임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우연인지 서정주의 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무등(無等)’을 말 그대로 풀면 ‘등급이 없다’는 의미,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는 가장들 사이에도 등급은 없다는 것을 까먹지 말자.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가장들이여, 그대들 또한 처자식의 눈에는 서정주 못지않은 ‘위대한 시인’으로 비쳐질지니,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하면서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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