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무등을 보며 - 가난한 가장이 가슴으로 쓴 시


무등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 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1954년 '현대공론', 서정주; 1915년-2000년>

장(家長)은 어떤 존재인가?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윤리가 굳건했던 시절에는 말 그대로 ‘집안[家]의 어른’이었으나 경제논리가 윤리를 지배하면서부터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소년소녀 가장’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실직 당한 4,50대 가장들이 심신이 유약해진 나머지 종종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가족 부양 부담감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얼마 전 부산에서는 후배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줬다가 떼인 30대 가장이 자신이 든 2억원짜리 생명보험을 타내 가족의 생계를 이을 목적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만년의 서정주 시인
전라북도 고창 출신 시인 서정주가 ‘무등을 보며’를 발표한 것은 한국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1년 후쯤인 1954년 8월, 시나 문학 전문지가 아닌 시사종합지 ‘현대공론(現代公論)’ 지면을 통해서였다. 송운영․이강민 등이 설립한 현대공론사에서 펴낸 ‘현대공론’은 1953년 10월 25일 창간호를 찍으면서 거창하게 출발했으나 1955년 1월 1일 제13호를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던 바, 거기 실린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역시 문학적 가치보다는 원고료를 위한 기고였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그래서 시의 화법 또한 내면의 고백이나 관조가 아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잔소리(?)로 흘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 이전 서정주가 추구해오던 시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주제 또한 교훈적이어서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 현상에 대한 강렬한 탐구가 주류를 이루던 초기시의 특징에서 벗어나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다가선 서정주 문학의 제2기 대표작”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서정주가 그 이후 ‘신라초’(1961년), ‘동천’(1969년), ‘질마재 신화’(1975년) 등에서 줄기차게 추구했던 게 민족적 정조와 샤머니즘이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단언컨대, ‘무등을 보며’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인이 부업(?) 삼아 쓴 작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싶다. 일제 시대에도 서정주는 시인으로서의 입지 강화와 그 놈의 알량한 원고료를 노려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항공일에’(1943년), ‘헌시(獻詩)’(1943년), '오장 마쓰이 송가'(1944년) 따위의 문학작품 아닌 친일작품들을 남발한 전과(?)가 있었다. 본인과 친지들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등을 보며’는 매우 당당하게 서정주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로 꼽힌다. 문학사적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지만 일반 시 독자들의 ‘서정주 대표작’ 리스트에는 항상 상위에 오른다. 그 이유가 뭔가? 읽기에 쉬우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생활고에 시달린 가장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시인의 특출한 머리로 쓴 시가 아니라 시장통 사람들이 공감하는 가슴으로 쓴 시라는 말이다. 실제로 ‘무등을 보며’를 발표할 때의 서정주는 전남 광주 조선대 국문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나 대우가 형편없어 점심을 거를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그런 가난 속에서 시인은 청탁 받은 시 한편을 기술자처럼 써주고는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받아 막걸리 한 잔 걸쳤을 터, 그 때 바라보던 무등산의 갈맷빛 등성이가 눈이 부시게 푸르렀을 것이고, 처자식 먹여 살리는 게 주옥같은 시를 쓰는 것보다 천만 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맹물 마시고 배부른 척 하는 자기 최면을 걸면서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고 그 얇은 입술을 다시 한번 지그시 깨물었을 ‘가난한 가장’ 서정주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난한 시인은 그렇게 두 아들을 잘 키워 장남 승해는 미국 변호사가 됐고 차남 윤 또한 미국 의사가 됐다.

시는 혓바닥을 놀리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가슴을 울려 토해내는 삶의 소리, ‘무등을 보며’가 서정주의 대표작 아닌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것도 극심한 생활고 속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몸으로 쓴 시이기 때문임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우연인지 서정주의 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무등(無等)’을 말 그대로 풀면 ‘등급이 없다’는 의미,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는 가장들 사이에도 등급은 없다는 것을 까먹지 말자.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가장들이여, 그대들 또한 처자식의 눈에는 서정주 못지않은 ‘위대한 시인’으로 비쳐질지니,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하면서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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