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6일 금요일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단독자(單獨者)의 천형(天刑)

아직은 철이 일러 텅 빈 롱아일랜드 존스 비치의 샤워 기둥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 한 마리.  홀로 앉아 있는 모습에서 외로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1991년, 류시화; 1958년- >


요일 오후 할일 없이 텅 빈 맨해튼 거리를 걷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심정적으로는 저 멀리, 쌍둥이 빌딩이 서 있던 자리의 텅 빈 하늘을 바라본다. 지난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지기 전 그것들이 다정히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쌍둥이라서 고독하지 않을 것”이라고 중얼거렸던 게 생각 나 쓴 웃음을 짓는다. 외로운 사람들이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하다못해 건물 하나를 지으면서도 짝을 지어주었건만,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질 줄이야...역시 고독이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인가?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는 인간에게 있어서 고독은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기꺼이 감내할 수밖에.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몸과 영혼을 다 바쳐 사랑했던 여인 레기네 올젠과 헤어지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기쁨과 감사로써 나의 독자라고 부르는 그 오직 한사람인 사람이여-. 자신의 강화집(講話集) 서문에 떨리는 손으로 그 구절을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나갈 정도로 사랑했던 여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여인, 왜 키에르케고르는 올젠과 헤어졌을까? 삶이란 “돌발적인 비약과 질적 변화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인 불안의 심연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것”이라고 규정했던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불안도 비례해서 증대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듯하다. 올젠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하는 불안으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아닌가?!

키에르케고르의 주장대로라면 모든 인간은 ‘단독자’(der Einzelne), 철학적으로 조명하자면 단독자란 대중이나 다수 집단 등과 상반된 개념이지만 사적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당신과 나 사귐을 전제로 하는 바, 인간은 누구나 홀로 있으면서 홀로 있지 않기를 원한다는 이율배반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올젠 하나만을 죽도록 사랑했듯이 올젠 역시 자기만을 이해하고 자기만을 죽도록 사랑하기를 바랐을 터, 무변광대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두개의 고독(孤獨)이 서로 포옹하는 극적인 사랑 속에는 뭔가 영원성(永遠性)이 있다고 파악했으나, 그 영원성이란 게 연애가 끝남과 동시에 소멸해버리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허망함이란! 그 허망함을 맞닥뜨리는 게 두려웠고, 그래서 불안했고, 결국은 헤어지고 말았던 게 아닌가 싶다.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표지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시인 류시화가 1991년에 펴낸 첫 번째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에 실린 동명의 작품에서도 천형을 겪는 단독자의 아픔이 진하게 느껴진다. 이 시에서의 ‘나’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까지도 ‘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흔드는 이’에게서 찾지만 언젠가는 그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절대고독(絶對孤獨),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는 그걸 감내할 자신이 없어서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류시화의 단독자는 그게 사랑이고 삶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류시화가 명상에 심취한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고 읊은 것도 그런 절대고독을 운명적인 것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출로 보인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쓸쓸한 것인지 그 자신 또한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불안해진다는 관찰에 동의한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제목 자체가 한편의 정갈한 시, 나머지는 감성과 사유가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사족에 불과하다는 느낌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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