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9일 화요일

낙타 -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큰 깨달음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2008년 창비, 신경림; 1936년- > 

(詩)는 철학(哲學)과도 통한다. 철학을 감동적으로 풀어쓰면 시가 되고, 시적 감동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면 철학이 된다. 시는 정서적 감동(感動)을 주목적으로 하고 철학은 논리적 깨달음을 주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굳이 깨달음의 뿌리인 리(理)와 감동의 근원인 기(氣)의 뿌리가 하나라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감동 속에 깨달음 있고 깨달음 속에 감동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일찍이 기원전 4백여년 전 동양철학의 비조(鼻祖) 공자(孔子)가 ‘시경(詩經)’을 편찬하고, 그보다 1백여년 쯤 뒤 서양철학의 한 기둥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élēs)가 ‘시학(詩學, Poetics)을 쓴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글로 쓰인 인류의 기록을 더듬어 보건대 시인 중에 철학자가 많았고 철학자 중에 시인이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19세기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자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도 인간의 감동과 논리적 사고의 뿌리가 하나라고 여겼던 것 같다. 무려 7대에 걸쳐 성직(聖職)을 이어온 개신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에머슨은 태생이 종교인이었으나 자신의 사유(思惟)를 기존 종교의 테두리 안에 가두지 않았다. 동양 사상에도 일가견을 이뤄 편협한 기독교적 독단이나 형식주의를 배척했고, 인간은 스스로를 신뢰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결국 자연과 신과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귀속된다는 범신론을 주장했었다. 이른 바 초월주의(超越主義, Transcendentalism)다. 미국철학을 유럽철학으로부터 분리 독립시켰다고 평가받는 초월주의는 “직관적 지식과 인간과 자연에 내재하는 신성 및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망라하는 관념주의의 한 형태”로서 신, 인간, 자연을 초월적인 우주 영혼의 공유자(共有者)로 간주했었다. 그랬던 만큼, 에머슨은 세속의 구속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사색을 즐겨 ‘문학적 철인’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에머슨이 신경림(申庚林, 1936년- )의 시 ‘낙타’를 봤다면 손뼉을 쳤을 것 같다. 충북 충주 출신으로서 1956년 ‘문학예술’지에서 ‘갈대’를 비롯한 몇몇 작품으로 추천을 받아 등단한 신경림은 잡지사·출판사 등을 전전하다가 시작에 몰두한 이래, ‘농무(農舞)’ ‘갈대’ 등에서 보듯 소외계층의 한을 풀어냄으로써 ‘민중시인’로 불렸으나, ‘낙타’를 전환기로 세속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을 관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다. 에머슨의 눈으로 본다면 ‘신, 인간, 자연을 초월적인 우주 영혼’을 천착하고 있음을 본다. 

신경림 시집 '낙타' 2008년, 창비
많은 사람들이 ‘낙타’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양자 사이의 인생 여로(旅路)를 먼저 떠올리지만 작품 속의 화자(話者)가 삶과 죽음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까먹어서는 괴리적(乖離的) 감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으로 풀어쓴 달관(達觀)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라고 풀어쓴 초월(超越)을 놓친다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나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이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로 상징되는 자연(自然)의 관점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낙타를 타고 저승으로 갔다가 다시 낙타를 타고 이승으로 돌아오는 윤회(輪回)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의 ‘누군가’가 에머슨의 ‘초월적인 우주 영혼’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시와 철학의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재차 실감한다. ‘낙타’ 이후 소외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한과 분노와 슬픔을 초월하여 삶을 관조하고 있는 신경림이 지난 해 7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손자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동시집 ‘엄마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를 펴낸 것도 수십 년 간의 시작(詩作)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초월적 우주 영혼’의 눈으로 본다면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보다도 엄마밖에 모르는 코흘리개 손자가 더 재미있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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