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아 푸른 솔아-百濟. 6
부르네, 물억새 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마비 울다 가는
삼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
허기 들면 솔닢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박영근(朴永根); 1958년-2006년>
소나무를 뜻하는 한자 송(松)의 원형은 ‘송(鬆)’, 긴[長] 터럭[彡]을 가진 나무[木]인데 그 터럭이 사시사철 변하지 않아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다’는 의미의 공(公)을 붙여 만들어낸 글자다. 그 점을 높이 평가하여 공자 또한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는 명언을 남겼고, 자고이래 많은 시인묵객들이 소나무를 애송하고 그려왔던 바, 조선조 후기 서예가․금석학자․문인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제주도 유배시절 서적을 구해다 주는 등 자신을 극진하게 챙겨준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를 꼽는다면 단연 소나무다. 끈질기게 오래 사는데다가 사철 푸르러 내우외환에도 불구하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변함없는 지조와 절개를 중시해온 한국인들의 성정과 매우 닮았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오죽하면 애국가(愛國歌)에까지 등장할까! 햇빛이 잘 드는 곳이면 어떤 땅이든 가리지 않고 잘 자라서 한반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거니와, 목재가 단단하고 잘 썩지 않아 예로부터 집을 짓는 데 사용돼 왔고, 싱싱한 솔잎은 통증과 피를 멎게 하고 송진은 염증을 빨리 곪게 하고 고름을 빨아내는 효능이 있어 여러모로 한국인들의 삶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 것 같다. x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목피’도 소나무 속껍질을 말한다. 지난 해 추수한 양식이 다 떨어지는 춘궁기가 되면 땅 속의 물을 빨아올려 한껏 부드러워진 소나무 속껍질까지 벗겨 죽을 쒀먹었으나, 소나무 속껍질은 위와 장을 거쳐도 완전히 분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분이 줄어들면 딱딱하게 굳어지는 성질이 있어 변비를 유발했고, 그런 사람들이 무리한 배변을 하다가 x구멍이 찢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x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까지 생겨나게 됐다.
박영근 시선집 '솔아 푸른 솔아' 2009년 강 출판사 |
x구멍이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소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남다른 감회에 젖을 수밖에. 그래서 소나무의 푸른 빛깔은 변치 않는 삶의 서러움의 색깔이기도 하다. 시인들의 눈에도 그런 빛깔로 보였다. 서정주는 ‘새벽 애솔나무’에서 “천 만 번 벼락에도 살아 남아 가자고/ 겨울 새벽 이 나라 비탈에 서 있는/ 너무 일찍 잠깨어난 우리 애솔나무야”하고 안쓰러워했고, 신경림은 ‘늙은 소나무’가 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고, 황지우는 아예 ‘소나무에 대한 예배’를 올리기도 했었다. 어찌 그 뿐이랴. 지난 1980년대 ‘취업공고판 앞에서’(청사, 1984)라는 시집을 펴내 소위 ‘노동문학’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받는 노동자 시인 박영근(朴永根; 1958년-2006년)이 자신의 한과 서러움을 담은 시를 쓰고는 제목을 ‘솔아 푸른 솔아’로 붙인 것도 뾰족한 솔잎의 푸름이 자신의 감성을 아프게 찔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목이 ‘솔아 푸른 솔아’임에도 불구하고 솔에 대한 묘사가 단 한 줄도 없는 이유가 뭔가? 소나무 껍질 같은 민중의 삶을 솔잎의 서러운 빛깔을 보라는 박영근의 의도를 간과하면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나 ‘시월비 어두운 산허리’에 서린 한의 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터, 작품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은유로 이해하는 게 옳다.
전라북도 부안 출신 박영근은 군 제대 후 서울로 이주하여 현장노동자로 일하다가 1981년 ‘반시, 反詩’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었다. 박영근 이후 박노해와 백무산 등이 잇따라 출현했다고 해서 ‘노동문학’ 1세대로 꼽지만 그를 ‘노동문학’의 테두리에만 가둬둘 수는 없을 것 같다. 2006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세상을 뜰 때까지 소위 민족민중문학의 전위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시작의 순수성만큼은 비싼 등록금 내고 상아탑에서 시작 수업을 받은 시인들 못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 역시 뛰어난 바, 노동시와 민중시를 뛰어넘는 문학작품으로서의 재조명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돈 내고 배워서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다듬은 감성으로 쓰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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