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9일 금요일

A Rainbow - 위선(僞善) 속에서 경건(敬虔) 찾기


A Rainbow (무지개)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내 가슴은 뛰노라 
A rainbow in the sky:                                하늘의 무지개를 품으면: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나 어렸을 때도 그랬고;
So is it now I am a man;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하고;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늙었을 때도 그러하리라, 
Or let me die!                                           아니면 차라리 죽게 하소서!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And I wish my days to be                          바라건대 나의 나날들이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타고난 경건(敬虔)으로 서로 서로 얽매이기를.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 

설(逆說, paradox)은 언뜻 보면 일리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순 덩어리인 것 또는 주장을 말한다. 영어 ‘paradox’의 뿌리는 ‘반(反)’이나 ‘역(逆)’을 뜻하는 접두사 ‘para’와 ‘의견’을 뜻하는 ‘dox’가 붙은 고대 그리스어 ‘paradoxos’로서 반대의견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한자 ‘역(逆)’은 쉬엄쉬엄 갈 착(辶) 위에 큰 대(大)를 뒤집어 ‘거스르다’라는 의미를 표현한 ‘屰(역)’을 얹어놓은 것으로서 ‘주류의 상식을 배반하다’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개인의 경험과 그 경험들이 긴 세월 동안 축적되어 나타난 사회의 가치판단이나 사회적 주류의 상식이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인간의 역사라는 게 승자의 기록에 지나지 않듯이 사회적 주류의 상식이라는 것 또한 ‘다수의 우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인의 사명은 그런 허점을 해부하여 진실에 접근하는 것, 많은 시인들이 다수의 관점을 거부한 채 자신만의 통찰을 내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드는 인간이 ‘착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역설 중의 역설, 아니 인간 세상 그 자체가 역설의 바퀴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역설 덩어리인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남의 것을 훔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게 장삼이사의 그렇고 그런 삶이라는 건 시장통 사람들도 다 안다. 그런 장삼이사들 또한 가끔은 “착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손님들을 속여먹는 장사꾼들일수록 교회에 더 열심히 다니고, 거짓말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진실한 사람을 좋아하고, 도둑놈들일수록 친구들에게는 술을 잘 산다. 그걸 ‘양심의 균형(均衡) 잡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의 본성은 본래 착하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믿는다면, 가끔은 착한 척이라도 해야 행복감을 더 느끼게 된다는 데 아무도 토를 달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윌리엄 워즈워드 전기, 스테픈 질
2011년,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19세기 전반 낭만파의 대표 시인으로서 영국 왕실로부터 ‘계관시인(poet laureate)’ 칭호를 받았던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1850)의 '무지개(A Rainbow)를 읽을 때도 머릿속에 역설이 떠올려진다. ‘순수’가 어쩌고 ‘경건’이 어쩌고 침을 튀기는 사람들이야말로 혀로 수박의 겉을 핥는다는 핀잔을 받아 마땅하다. 무지개는 대기 중에 떠 있는 작은 물방울들에 햇빛이 굴절 반사되어 해의 반대쪽에 길게 뻗쳐 나타나는 일곱 가지 색깔의 반원 모양의 ‘헛것’에 지나지 않는 바, 그 ‘헛것’을 가슴에 품는다(behold)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 아닌가?! 어렸을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러하겠다고? 그 또한 거짓말! 어렸을 때 그랬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희망사항’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역설로 보면 틀림이 없다. 그걸 잘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들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확실한 역설로 쐐기를 박아놓은 워즈워드의 배려를 미안하고 고맙게 받아들여야할진저! 

‘타고난 경건(natural piety)’에 이르면 이 작품에서의 역설은 클라이막스에 달한다. 영어 ‘nature’의 뿌리는 라틴어 ‘natura’이고 ‘natura’는 ‘태어나다’라는 의미의 ‘nasci’에서 나왔던 바, ‘natural’은 ‘원래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의미다. 또 ‘piety’의 뿌리는 라틴어 ‘pietas’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의무’ ‘효성’ ‘경건’ 따위를 의미했던 바, 그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의무’ 또는 ‘경건’을 타고났던 예수의 사체(死體)를 표현한 일체의 예술작품을 ‘피에타(Pieta)’라고도 하지만 그건 인간이 아닌 신의 아들 이야기이고, 욕망덩어리를 끌어안고 태어난 인간의 ‘natural piety’는 ‘위선(僞善)’일수도 있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piety’의 형용사형 ‘pious’는 ‘종교를 빙자한’ ‘위선적인’이라는 의미로도 쓰이거니와 ‘pious hope’는 “비현실적이어서 이뤄질 것 같지 않은 희망”을 말한다. 

워즈워드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 종교개혁, 데카르트와 루소로부터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자였다는 점 또한 이 작품 속의 ‘역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낭만주의(Romanticism)’는 기이(奇異)·가공·경이 등을 뜻하는 라틴어 ‘romanice’에서 나온 것으로서, 문학용어로서의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F. 슐레겔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량하나 문명에 의해 타락한다는 근본이념 아래 이성보다 정서를 신뢰하여 영혼의 내적 추구와 폭로 및 위선에 대한 증오를 주로 다뤘다는 점을 까먹어서는 아니 된다. 이른바 원시성·유아 찬미, 고대와 중세에 대한 동경 외에 이국취미·지방색·이상취향(異常趣向)·반사회·초월주의·밤[夜(야)]·박명(薄明)·죽음·꿈·환상·폐허 취미·악마성·무의식·유동성 등을 특징으로 했던 바, 15살이 채 되기도 전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에 맡겨져 갖은 멸시와 고독을 친구 삼으면서 힘겹게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혁명기의 급진사상에 물들기도 했던 워즈워드의 ‘무지개’ 또한 그런 낭만주의적 사고의 결실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걸 ‘무지개’ 등의 자연 현상으로 풀어낸 점이 워즈워드의 특장점이긴 하지만. 

‘무지개’를 감상할 때마다 지저분하고 나약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삶을 참으로 아름답고 경건(?)하게 포장했다는 칭찬이 절로 나온다. 워즈워드야말로 욕망덩어리를 끌어안고 태어나 이따금은 착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장삼이사들의 인간성(그게 ‘natural piety’인지 모르겠지만)을 사랑하고 연민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인이었던 것 같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