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일 화요일

행궁(行宮) - 변절자의 세상만사 변화 읽기


行宮(행궁) 

寥落古行宮(요락고행궁)   쓸쓸하게 쇠락한 옛 행궁 
宮花寂寞紅(궁화적막홍)   궁의 꽃만 적막하게 붉네 
白頭宮女在(백두궁녀재)   흰 머리의 궁녀 남아있어 
閑坐說玄宗(한좌설현종)   한가로이 앉아 현종 시절 이야기하네 

                                 <원진(元稹); 779년-831년> 

상만사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 변화를 점쳐보고자 만들어진 게 주역(周易), ‘주(周)나라 때의 점서(占書)’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지만 두루 주(周) 바꿀 역(易)을 풀면 ‘두루 바뀐다(변한다)’는 의미도 된다. 세상사라는 게 두루 바뀌고, 그 바뀌는 이치는 간명한데, 바뀐다는 사실 만큼은 바뀌지 않아 주역의 요체를 간단하고 평이한 이치에 따라 변한다는 의미의 간역(簡易),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의미의 변역(變易), 이 세상에서는 변화한다는 사실 하나만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역(不易)으로 간추리기도 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두발로 딛고 서 있는 이 지구 땅덩어리가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중심축이 24.5° 기울어진 채 스스로 돌면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데서 보듯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걸 다시 한번 더 강조라도 하듯 주역 64괘 중 마지막에서 두 번째 괘 또한 ‘기제(旣濟)’ 즉 ‘완성됐다’이고 마지막 괘는 ‘미제(未濟)’ 즉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유한한 삶을 살다 죽는 인간 또한 끊임없이 변한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르고, 오늘의 ‘나’는 내일 또 어떻게 달라질지 단정 못한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변하지 않는 보석이나 변하지 않는 마음을 귀히 여기는 것도 ‘나’ 자신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보려는 심리의 투사(投射)일지도 모르는 터, 자고이래 지조나 절개를 높이 평가하면서 소위 변절자들에게 손가락질하는 풍습도 그래서 생겨난 난 게 아닌가 싶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만물에 감정을 이입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심(詩心)을 노래하는 시인들의 시세계가 자주변화하고 사회적 태도 또한 변하는 것도 그 만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하는 직업병(?) 탓은 아닌지?! 원초적인 생명력을 노래하던 서정주(徐廷柱)는 일제 때와 독재시대에 천연덕스럽게 변신을 꾀했고 박정희 독재 때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김지하(金芝河)도 지난 번 대선서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지지하는 등 고금의 숱한 시인들이 변절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음을 본다. 

원진집 교주, 2011년, 상해고적출판사
지조(志操)를 숭상하는 유교문화 탓인지 중국 당(唐)나라 때의 시인 원진(元稹; 779년-831년)도 변절자라는 손가락질을 많이 받는다. 가난한 집안을 자신이 일으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15세의 나이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으나, 환관 및 수구세력과의 불화로 좌천을 당한 후 갓끈 떨어진 신세가 된 것을 후회하고는 그들에게 손을 잡고 공부시랑(工部侍郞)과 동평장사(同平章事) 등의 벼슬을 지낸 이야기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809년 동천으로 좌천되어 이제나 저제나 다시 중앙으로 복귀할 날만을 기다리던 시절 기생 설도(薛濤)와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눴으나 변심하여 설도를 버리고 옛날 은사 위하경(韋夏卿)의 질녀와 혼인한 이야기는 더더욱 유명하다. 당시 원진을 못 잊어 하던 설도는 깨진 사랑을 슬퍼하며 ‘춘망사(春望詞)’를 지었고, ‘춘망사’는 지금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노래로 불린다. 

‘행궁(行宮)’은 원진이 당(唐) 현종(玄宗)이 과거 양귀비를 데리고 성밖 나들이를 할 때 묵던 궁전에 들렀을 때의 감회를 읊은 시, 현종은 안록산의 난으로 실각한 후 태상황이 되어 762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던 바, 행궁에 현종 때의 이야기를 하는 백발의 궁녀가 남아 있다고 읊은 것으로 보아 현종 사후 50년여쯤 지난 뒤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편 서사시 ‘연창궁사(連昌宮詞)’에서 궁인들의 대화형식을 이용하여 현종의 사치와 황음무도함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며 호된 비판을 가한 것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 원진의 생각이 자주 바뀌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출세를 위해 변절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 지은 시 치고는 너무 감상적이지만, 변화에 민감한 성품 탓이었는지 몰라도 영락한 행궁에서 세월의 변화를 너무도 잘 읽어내고 또 그걸 멋들어지게 읊어내고 있는 바, 적막하리만치 붉은 꽃과 늙은 궁녀의 하얀 머리의 극적인 대비에는 찬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그 극적인 대비 하나로 세월의 무상함과 현종과 양귀비의 긴 긴 이야기들을 모두 담아내고 있지 않은가?! 

원진이 변절하지 않고 세상과 맞서다가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처럼 낙백했더라면 더 나은 작품을 썼을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변절을 손가락질하는 유교가 지배적이었던 시절 원진은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함게 주도했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에 비해 문학적 재능이 뒤진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분리해서 감상하는 요즘 백거이 못지않게 다시 주목받고 있음을 본다. 그 만큼 그의 시재가 그 만큼 탁월했다는 반증이리라.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게 변한다는 사실 하나 빼놓고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간파한 주역을 재차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세상이 변하면서 시인에 대한 평가도 변하고 그 시인이 남긴 시에 대한 감상 또한 변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