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5일 월요일

망악(望岳) -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望岳(망악) 

岱宗夫如何(대종부여하)    태산은 과연 어떠한가 
齊魯靑未了(제노청미료)    제나라와 초나라에 걸친 푸름이 끝나지 아니 하였네 
造化鐘神秀(조화종신수)    만들어져 변한 건 조물주의 빼어난 솜씨이거니와 
陰陽割昏曉(음양할혼효)    음과 양이 어둠과 밝음을 가르는구나 
荡胸生層雲(탕흉생층운)    가슴을 활짝 펴니 층계구름 생겨나고 
決眦入歸鳥(결제입귀조)    눈 크게 뜨니 귀환하는 새들이 들어오는구나 
會當凌絶頂(회당능절정)    언젠가는 꼭 정상에 올라 
一覽衆山小(일람중산소)    뭇 산이 작음을 한눈에 굽어보리라 

                                        <두보(杜甫; 712년-770년> 

마 전 명예 퇴직한 서울의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을 때 “대한민국의 산이란 산은 다 올라가봤다”고 했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는 게 답답하여 운동 겸 뒷동산 꼭대기에도 올라가 보기도 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올망졸망한 시가지를 내려다보노라면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아서, 등산클럽에 가입하고는 졸래졸래 따라 다니다보니 웬만한 산은 다 올라가보게 됐다는 것이었다. 1997년 금융위기로 인해 숱한 월급쟁이들이 직장에서 등 떠밀려 쫓겨났을 때 관악산 입구에 신사복 입고 등산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 등산로 입구에 싸구려 운동화를 파는 가게까지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생각 나 쓴웃음이 머금어졌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하고 출근하는 척 신사복을 입고 나와 거리를 방황하다가 터덜터덜 관악산에 오르는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리라. 자식 등록금 걱정, 먹고 살 걱정, 노후 걱정...돈 안 들이고 시간 때우기 위해 배낭 대신 걱정보따리를 짊어지고 관악산 꼭대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노라면 오만가지 생각이 뜬 구름처럼 오락가락...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 꽉 막힌 실업자의 가슴이 조금이라도 뚫린다면 태산인들 오르지 않았겠는가?! 

중국 대륙 동쪽에 위치한 해발 1,545m의 태산(泰山)은 보통명사인 ‘큰산[泰山]’을 고유명사로 만들어 버릴 만큼 크다. 춘추전국시대 장자(莊子)는 소요유(逍遙遊)에서 전설의 큰 새 붕(鵬)의 크기를 과장하기 위해 등이 ‘태산과 같다(背若太山)’고 했으나 그 때의 태(太)는 단지 ‘크다’는 의미일 뿐이고 태산(泰山)의 태(泰)는 ‘크고 넉넉하다’라는 의미인 바, ‘泰山’은 산이 커서 모든 것을 다 품어준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또 태산은 중국인들이 가장 숭상했던 방위인 동(東)에 위치하여 서악(西岳)인 섬서성의 화산(華山), 남악(南岳)인 호남성의 형산(衡山), 북악(北岳)인 산서성의 항산(桓山), 그리고 중악(中岳)인 하남성의 숭산(崇山)을 거느리는 오악지장(五岳之長) 또는 오악독존(五岳獨尊)이라고도 불렸다. 맹자(孟子)는 진심장(盡心章) 상편(上篇)에서 “공자께서는 동산에 올라 보고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 보고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고 말하면서 “도달하는 경지가 높고 크면 클수록 그 아래의 것들은 작은 것으로 눈에 비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기도 했다. 

두보의 초상
39세가 되어서야 겨우 미관말직을 얻어 입에 풀칠이나 하던 중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터져 실업자가 된 채 이리저리 표랑했던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년-770년) 또한 20세기 서울서 살았다면 신사복 입고 관악산에 올랐었을 것 같다. ‘망악(望岳)’ ‘등악양루(登岳陽樓)’, 등고(登高) 등 높은 산을 바라보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 지은 시가 유난히 많다. 그래도 뭔가 희망을 품을 수 있던 젊었을 때는 높은 산을 바라보며 더 나은 삶을 꿈꿨고 이런 저런 가망성이 다 없어진 뒤부터는 세상 내려다보면서 불우한 자신을 한탄했었다. 그 중 태산을 바라보며 지은 ‘망악’을 보면 입신양명을 꿈꾸는 젊은 백수건달 두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4세 때 진사 시험에 낙방한 후 곤주사마였던 부친을 따라 산동성(山東省)으로 가던 중 태산을 바라보며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을 보면 낙방거사인 주제에 아직은 기가 살아 큰소리 뻥뻥 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산동성에서 이백(李白) 등을 만나 교유하다가 장안으로 옮겨와 고관대작에게 벼슬을 청탁하는 간알시(干謁詩)나 쓰면서 10여년을 허송세월한 후부터는 그런 ‘큰소리’가 팍 쪼그라든다. 이후 반란군에게 붙잡혀 끌려가기도 하고, 먹고 살기 위해 식구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친지들을 찾아다니다가, 온갖 고생 다한 후 죽기 3년 전에 지은 ‘등고(登高)’를 보면 “간난이 괴롭고 한이 맺혀 서리 같이 흰 귀밑털만 늘고(艱難苦恨繁霜鬢) 화톳불 스러지는데 탁주 술잔만 새로 머무는구나(燎倒新停濁酒杯)”고 한탄만 길게 늘어놓고 있음에 처량하기 짝이 없다. 

젊었을 적 높은 곳을 올려다보면서 키운 꿈이 늙어서 낮은 곳을 내려다볼 때 회한으로 변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한 두보, 인생 높낮이에 연연하다가 술잔도 얼른얼른 비우지 못할 정도로 늙어서야 꿈과 회한이 불이(不二)라는 것을 깨달은 건 아닌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인생일수록 만년에 터덜터덜 내려오는 길이 멀고 힘들다는 것을 어느 명예퇴직자가 감히 부인하랴. ‘태산’의 ‘태’가 단순히 크다는 의미의 ‘太’가 아니라 ‘커서 넉넉하게 품어준다’는 의미의 ‘泰’인 까닭도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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