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5일 수요일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차안(此岸)과 피안(彼岸) 경계에 서서

3월 중순인데도 뉴욕 일원에 폭설이 내려 거리마다 인적이 끊겼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피안처럼 느껴진다.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이게 누구의 숲인지 아는 것 같기도 하네.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그 사람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그는 내가 여기 멈춰 선 것을 보지 못하리라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그의 숲에 눈이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네.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내 작은 말은 기이하게 생각하겠지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근처에 농가라곤 한 채도 없는데 멈춰 선 것을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서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연중 가장 캄캄한 이 저녁에 말이야.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말이 방울을 흔들어대네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 
뭐가 잘못됐느냐고 묻는 것 같네.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그 밖의 유일한 소리는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안락한 바람과 포근한 눈송이 휩쓸리는 소리뿐.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어, 
But I have promises to keep,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그리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어,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그리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어.


<From The Poetry of Robert Frost, edited by Edward Connery Lathem,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


음을 뜻하는 영어 ‘death’의 뿌리는 ‘죽다’라는 의미의 고대 네덜란드어 ‘dood’와 고대 게르만어 ‘tod’로서 생명체의 삶이 끝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죽음을 뜻하는 한자 사(死)는 영어보다는 구체적이다. 살 바른 뼈 알(歺)에 화할 화(化)가 변한 비수 비(匕)가 붙은 것으로서 죽어서 살과 뼈가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생명체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삶을 끝낸다는 것은 어의(語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죽음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도 없다. 누구나 다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지만 아무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유의미한 삶을 꾸려가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보다 겸손하게 죽음을 준비하게 된다. 끝없는 윤회의 한 과정인 인생을 고해로 간주하는 불교에서 열반(涅槃)을 중시하는 것도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이해된다. 열반은 ‘바람 따위가 불기를 멈추다’ 또는 ‘촛불 등을 불어서 끄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를 음역한 것으로서 “번뇌의 불을 꺼서 깨우침의 지혜를 완성하고 완전한 정신의 평안함에 놓인 상태”를 말한다.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은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解脫) 있으므로 적정(寂靜)한 것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에 속박된 현상 세계를 차안(此岸)이라 하고 열반의 세계를 피안(彼岸)이라고 한다.

'stopping by woods...'도록(Susan Jeffers, 1978)과 만년의 로버트 프로스트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 서서 차안과 피안을 번갈아 바라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차안에 대한 미련? 피안에 대한 두려움? 슬픔과 아쉬움 아니면 해탈과 순응?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스쳐지나갈 지도 모른다. 자연 속에서 인생의 깊고 상징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었던 미국의 국민시인 로버트 L.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1874∼1963)도 그랬던 것 같다.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학교 교사였다가 언론인으로 변신한 윌리엄 프레스코트 프로스트(William Prescott Frost)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죽은 후 북동부 매사추세츠주 로렌스로 이주하여 성장했던 프로스트가 1923년에 발표한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를 읽다보면 차안과 피안의 차이가 감지된다. 첫 머리를 ‘Whose woods’로 시작한 것은 네 것 내 것 소유권을 다투면서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차안의 삶 대유(代喩), 성가시고 짜증나는 차안의 말방울 소리와 안락한 바람이 포근한 눈송이를 휩쓸어가는 피안의 소리가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자신의 삶과 죽음을 성찰하고 있음을 본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 때는 자작시를 낭송할 정도로 시낭송 순회공연으로 명성을 날렸던 프로스트는 압운(押韻)의 대가이기도 했다.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에서도 현란하고도 오묘한 각운(脚韻)이 돋보인다. 제목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에서의 ‘Stopping’과 ‘Evening’, 첫째 연의 know-though-snow, 둘째 연의 queer-near-year, 셋째 연의 shake-mistake-flake, 마지막 연의 deep-keep-sleep-sleep를 의식하면서 다시 한 번 읊조려보라. 시와 음악 사이의 울타리가 무색해진다. 뿐만이 아니다. 1연-2연-3연-4연을 전개하는데 있어서도 각 연의 세 번째 행의 마지막 단어 here-lake-sweep로 고리를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연의 각운 또한 죽음을 의미하는 ‘Sleep’을 선택하여 무성음 P로 마침표를 찍는 정교함에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 또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가르친다. 이른 바 ‘불이(不二)’다. 불이는 피(彼)와 차(此)의 분멸(分別)이 없는 것, 인간의 번뇌와 괴로움은 ‘하나(一)’에서는 생기지 않는바 항상 ‘둘(二)’로부터 발생하는데, 주관과 객관의 분열을 넘어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깨칠 때 비로소 번뇌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즉 둘로 보면 미지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프로스트가 불가의 도를 공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각운을 이용하여 차인과 피안을 하나로 매끄럽게 연결한 것을 보면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오늘의 삶이 더 유의미해진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깨달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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