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4일 금요일

정인벽옥가 (情人碧玉歌) - 여자의 첫 경험



情人碧玉歌 (정인벽옥가)  2수


碧玉小家女 (벽옥소가녀) 벽옥은 작은 집 여자(첩) 
不敢攀貴德 (불감반귀덕) 감히 귀한 분에게 매달릴 수 없어
感郎千金意 (감랑천금의) 낭군의 천금 같은 뜻을 고맙게 여길 뿐이네 
慙無傾城色 (참무경성색) 성을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답지 못함이 부끄럽네

碧玉破瓜時 (벽옥파과시) 벽옥이 외를 깰 때
郎爲情顚倒 (낭위정전도) 낭군이 정을 베풀어 껴안고 뒹구네
感君不羞赧 (감군불수난) 낭군이 싫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음이 느껴지니
廻身就郞抱 (회신취랑포) 몸을 돌려 낭군 품에 안기네

                                                                               <손작(孫綽); 314년-371년>

령(年齡)이란 게 뭔가? 년(年)은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에서 나온 말로 본래 ‘벼가 익다’라는 의미였으나, 벼는 일년에 한 번 익으므로 통상 일모작이었던 한자문화권에서는 자연스레 ‘한 해’를 뜻하게 됐다. 또 령(齡)은 앞니를 의미하는 ‘치’(齒)가 ‘령’(令)과 붙어서 된 말로 일년에 앞니가 하나씩 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앞니가 하나씩 빠지는 소나 말의 나이를 가리켰다. 그 두 글자가 서로 붙어 나이를 의미하는 연령(年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미개한 농경사회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생존해온 시간을 따질 때 연령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었겠지만 사회가 발달하고 분화되면서 단순히 태어나서 지나는 시간을 달력에 따라 계산한 역연령(曆年齡, Chronological age), 사람의 뼈가 형성되는 골화과정(骨化過程)이 나이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X선으로 촬영하여 측정하는 골격연령(骨格年齡, Skeletal age), 지능 발달로 측정하는 정신연령(精神年齡, Mental age) 등 여러 가지 방법이 등장하게 된다. 

여자가 섹스를 알게 되는 나이는? 한국서 초등학교 여학생들까지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찍어 음란물 사이트에 판매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지만 그건 발랑 까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일 뿐 자고로 초경(初經) 전후에 섹스를 알게 된다는 게 정설, 요즘엔 여자아이들이 조숙하여 13-14세라지만 그 옛날엔 16세쯤 초경을 경험했었다. 파과지년(破瓜之年)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瓜(과)’자 가운데를 나누면 두 개의 '八(팔)'자 두 개가 되는데, 그것들을 합하면 16이 되어 여자 나이 16세 즉 ‘이팔청춘’을 뜻하는 바, '외를 깬다'라는 의미의 '파과(破瓜)'를 요즘 말로 풀이하면 '처녀성을 잃다'일 것이다. 이 때의 ‘외’는 길쭉한 한국산 오이가 아니라 속에 붉은 빛이 감도는 외, 청(淸)나라 문인 원매(袁枚) 또한 그의 시론(詩論)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파과, 어떤 사람들은 이를 ’초경이 시작되었을 때 외를 깰 때처럼 곧 홍조를 보게 된다‘고 풀이한다(破瓜 或解以爲月事初來 如破瓜則見紅潮者)”고 말했고, 같은 청나라 학자 적호(翟灝)도 ‘통속편(通俗編)’에서 “풍속을 살피건대, 여자가 몸을 깨는 것을 외를 깬다고 한다(按俗以女子破身爲破瓜)”고 적었다. 그러나 남자의 파과지년(破瓜之年)은 다르다. ‘八’ 두 개를 곱하면 64가 되는데, 남자 나이 64세면 혼자 잠자리에 든다는 의미로서, 송(宋)나라 축목(祝穆)은 ‘사문유취(事文類聚)’에서 “당나라 여동빈(呂洞賓)이 장기에게 보낸 시에 '공성당재파과년(功成當在破瓜年)'이라는 구절이 있는 바, '파과'는 남자의 나이 64세를 뜻하기도 한다”라고 기록했었다.

‘파과지년’의 원전은 중국 진(晉)나라 시대의 시인 손작(孫綽) 시 ‘정인벽옥가(情人碧玉歌)’, 진나라 항간에 유행했던 악부(樂府)로서, 여남왕(汝南王) 사마의(司馬義)가 자신의 애첩 벽옥(碧玉)을 위해 손작에게 청하여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만, 이후에도 이런 저런 ‘벽옥가’가 유행한 것을 보면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던 사랑노래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싶다. 또 송나라 때 곽무천(郭茂倩: 1041-1099)이 편찬했다는 ‘악부시집’(樂府詩集)‘에는 “송(남북조시대)의 여남왕이 지었다(宋汝南王作)”고 쓰여 있지만 곽무천이 옛날 노래들을 채집 수록할 때 진나라 손작의 ’정인벽옥가‘를 모방하여 유행했던 ’벽옥가‘를 엄밀히 구별하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정인벽옥가‘는 남자들을 위한 음란 시, 얌전한 아가씨들이 읽기엔 매우 부적합(?)한 시였을 것 같다.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성기에 삽입되어 처녀막이 파괴될 때, 남자는 흥분을 못 이겨 부르르 떨고, 여자도 그런 남자의 사랑을 감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몸을 돌려 남자 품에 안긴다는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다. 어떤 사람들은 ‘벽옥(碧玉)’을 밋밋하게 ‘푸른 구슬’이라고 번역하지만 천만의 말씀, 그 옛날 임금의 성기를 ‘옥근(玉根)’이라고 표현한데서 보듯 ‘벽옥’은 매끄럽고 푸른 색깔의 남성 성기를 은유적으로 일컬은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전도(顚倒)’는 ‘난새(방울새)를 엎어지게 하고 봉황새를 넘어뜨리다’라는 의미의 ‘전란도봉(顚鸞倒鳳)’의 줄임말로 남녀가 정사를 벌이는 것을 말한다. 섹스와 연관되었을 때는 ‘남자’ ‘사내’를 뜻하는 ‘랑(郎)’을 쓰고 순정이나 사랑과 연관되었을 때는 ‘님’ ‘남편’을 뜻하는 ‘군(君)’자를 쓴 것도 이채롭다. 여자가 섹스를 할 때는 상대를 남자로 인식하지만 사랑을 느낄 때는 님으로 여긴다는 함의가 읽혀지기도 한다. 

후대에 그려진 손작의 초상
손작이 어떤 사람이기에 남녀상열(男女相悅)을 드러내놓고 까발리는 것을 터부시하던 시절에 그런 음란한 시를 썼나? 손작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자유분방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기품이 있었고 솔직담백했다고 전해진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왕희지가 풍광이 아름다운 회계(會稽)의 난정(蘭亭)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를 열어 문사 41명의 시문을 묶은 책을 엮고는 저 유명한 서문 ‘난정서(蘭亭序)’를 썼을 때 그 뒤에 또 다른 서문 ‘난정후서(蘭亭後序)’를 붙일 정도로 당대에 글재주를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어 그 두 종교를 한 작품 속에 용해시킨 그의 대표작 ‘유천태산부(遊天臺山賦)’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그가 남녀의 섹스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정인벽옥가’가 사족(士族)들에게까지 읽혀지면서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도 그의 명성이 작품의 통속성을 덮어버릴 만큼 높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