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5일 토요일

산석(山石) - 반골(反骨)의 마음 다스리기

아이슬란드 싱벨리어 국립공원의 한 야산 꼭대기에 서 있는 돌탑.










산석(山石)

山石犖確行徑微 (산석락확항경미) 산석은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데 가는 길은 좁아
黃昏到寺蝙蝠飛 (황혼도사편복비) 황혼 녘 절에 이르니 박쥐들만 날아다니네
升堂坐階新雨足 (승당좌계신우족) 법당에 올라 섬돌에 앉으니 비가 발치를 적시는데
芭蕉葉大梔子肥 (파초섭대치자비) 파초 잎은 커지고 치자는 살이 찌는구나
僧言古壁佛畫好 (승언고벽불화호) 중이 말하기를 고벽의 불화가 좋다고 하기에
以火來照所見稀 (이화내조소견희) 불 들고 비춰보니 드물게 보는 것이네
鋪床拂席置羹飯 (포상불석치갱반) 상이 펴져 자리 쓸고 앉으니 국과 밥이 차려지고
疏糲亦足飽我飢 (소려역족포아기) 거친 현미밥일망정 주린 배 채우기에 넉넉하네
夜深靜臥百虫絶 (야심정와백충절) 밤 깊어 조용히 자리에 드니 벌레소리 그치고
淸月出嶺光入扉 (청월출령광입비) 맑은 달 고개 위에 솟아 문짝 틈으로 비춰드네
天明獨去無道路 (천명독거무도노) 날이 밝아 혼자 떠나는데 길이 없어 
出入高下窮煙霏 (출입고하궁연비) 높고 낮은 언덕길 오르내리다가 안개에 길이 막혔네
山紅澗碧紛爛漫 (산홍간벽분난만) 산 붉고 계곡물 푸르러 어지러이 뒤섞이는데
時見松櫪皆十圍 (시견송력개십위) 문득 보이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열 겹
當流赤足蹋澗石 (당류적족답간석) 흐르는 물 있어 발을 담구고 개울 돌 밟으니 
水聲激激風吹衣 (수성격격풍취의) 물소리 요란하고 바람에 옷자락 나부끼네
人生如此自可樂 (인생여차자가낙) 인생이 이와 같으면 절로 즐거워질 만한데
豈必局束爲人鞿 (개필국속위인기) 어찌 일에 얽히어 고삐를 잡힐까
嗟哉吾黨二三子 (차재오당이삼자) 안타깝구나, 나와 무리지어 놀던 친구들이여
安得至老不更歸 (안득지노부갱귀) 어찌 다 늙도록 다시 돌아오지 못 하는가

                                                                           <한유(韓愈); 768년-824년>

이 먹을수록, 세상 경험이 많아질수록, 사람의 생각도 바뀐다. 생각이 바뀌면 경물(景物)도 달라 보인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도 한다. 그 말을 어떤 사람들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풀이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 세상만사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만 천만의 만만의 말씀, 자신의 마음이 변하고 그 변화에 따라 세상만사가 달라 보인다는 또 다른 이치를 잠시 까먹은 사람들의 섣부른 단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음을 다스리면 저 마음이 고개를 쳐들어 세상만사는커녕 자기 마음을 채 다스리기도 전에 죽는 게 장삼이사의 인생이라는 것을 나이 먹어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자기최면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속인다고나 할까, 자기를 속일 수 있으면 세상을 속일 수 있다는 논리의 비약을 함부로 비웃을 수가 없다. 세상을 원망하다가 모두 다 용서해주고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상 원망해봤자 내 속만 끓일 뿐 세상은 변함이 없어서, 결국은 마음이나마 편하게 먹고자 포기와 체념을 용서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만소당죽장화전(晩笑堂竹荘畫傳, 1921년 발행)에 
실려 있는 한유의 초상
지금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당(唐)의 문장가 한유(韓愈)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잃고 또 3세에 아버지가 타계하여 박복하기 짝이 없는 유년을 보내던 중 14세에 형 한회(韓會)까지 죽자 형수 정씨에게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한유, 7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하여 13세에 문장에 재능을 보였다고 하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고는 세 번씩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관직에 천거됐던 불운한 청년, 세상을 원망할 자격(?)이 차고 넘쳤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골 기질을 키웠던 듯싶다. 현실비판 의식이 강했다. 육조(六朝) 이래 문단의 정형처럼 유행해온 병려체(騈儷體)에 대하여 수사주의에 치중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유스러운 형식을 표본으로 하는 한대 이전의 고문(古文)을 부활시키자고 주장했던 것도 그렇고, 태자가 요절하여 비통해하다가 불교에 빠져들던 헌종(憲宗)이 막대한 재물을 들여 법문사(法門寺) 불사리를 궁중으로 들여와 공양하자‘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를 올려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된다(佛不足信)"고 간언했던 것도 그의 반골기질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에 헌종이 대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중신들의 간언으로 사형만은 면한 채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당하고 만다. 헌종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국자제주(國子祭酒), 병부시랑(兵部侍郞), 이부시랑(吏部侍郞), 어사대부(御史大夫) 등등의 직을 역임하다가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한유가 낙백의 시절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시 ‘산석(山石)’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는지 진하게 드러난다. ‘산석은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데 가는 길은 좁다’는 것은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는 심정의 토로, ‘황혼녘’은 ‘낙백의 길’이고 ‘박쥐’는 자신을 헐뜯고 모함하는 무리, 배불론(排佛論)을 부르짖던 자신이 절간을 찾아 한 끼니 신세를 지리라고는 전에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어쩌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런 상상을 해봤는지도 모르겠다. 고벽의 불화가 좋다는 중의 말에 마지못해 감상하는 척 하고는 ‘드물다’(稀)고 평한 것도 그런 방증의 하나로 보인다. ‘稀‘는 ’보기 드물다’는 뜻도 있지만 ‘희미하다’라는 뜻도 있는 바, 중이 좋다고 하는 고벽의 불화를 봤더니 희끄무레해서 잘 보이지 않더라(별 것 아니더라)는 중의가 읽혀진다. 입안에서 껄끄럽게 따로 도는 거친 현미밥을 시장기를 반찬삼아 배불리 먹었다는 것도 그렇고! 벌레소리와 맑은 달빛과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와 개울물과 옷자락 나부끼는 바람만으로도 인생이 줄거울 수 있다는 자기최면에 이어 ‘자신과 무리지어 놀던 친구들’(吾黨二三子)에게까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확신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안쓰럽기도 하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처가 아닌 한 누구라서 부인하랴. 한유가 마음을 다스리면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불교를 배척하고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이성을 가다듬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를 숭상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을 스쳐가는 풍월으로라도 모두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 문구 하나만으로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게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 세상을 사는 인생의 깨달음이기에 아직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고뇌와 번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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