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추세츠 보스턴과 케임브릿지 사이를 관통하는 알스톤 리버 사이드의 설경. |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민음사, 1974)의 표제시, 고은(高銀):1933 - >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언젠가는 죽는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역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 옛날 로마의 장군들이 원정에서 개선하여 화려한 시가 퍼레이드를 벌일 때 노예를 시켜 큰소리로 외치게 한 데서 유래했다는 라틴어 ‘메멘토 모리’의 의미는 말 그대로 "죽음을 기억하라”,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는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으로서 박수갈채를 받고 있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라고 자신의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답게 또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는 시간의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바, 죽음이야말로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근년의 고은 시인(사진 왼쪽)과 1974년 민음사에서 펴낸 시집'문의 마을에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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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 출신의 시인 고은<高銀, 본명은 ‘고은태(高銀泰)’>은 일찍이 삶과 죽음이라는 게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군산중학교에서 4학년까지 수학한 후 1952년 19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작(詩作)을 했던 특이한 이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들 중에는 불교 냄새가 나는 것들이 많다. 그에게 명실상부한 시인의 명함을 쥐어준 작품으로 평가되는 ‘문의(文義)마을에 가서’도 그 중 하나다. 인적이 끊긴 채 눈만 내리는 문의 마을의 풍광을 불교 수행자들의 말로 표현하자면 적멸(寂滅), 열반(涅槃)의 세계에서나 느낄 수 있는 정적(靜寂)과 무념(無念), 작중의 화자 역시 그런 적멸 속에서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며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본다. 불교 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로 일컬어지는 열반은 번뇌의 불을 꺼서 깨우침의 지혜를 완성함으로써 최고의 정신적 평안함에 놓이는 상태,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이므로 적정(寂靜)을 덧붙여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도 하는데, 열반적정은 일체개고(一切皆苦) · 제행무상(諸行無常) · 제법무아(諸法無我)와 함께 불교 근본교의인 ‘사법인(四法印)’에 속한다.
불가에서의 해탈은 번뇌를 전제로 한다. 이른 바 불이(不二)다. 고은이 눈에 덮이는 문의 마을의 적막 속에서 죽음을 봤지만 그 죽음을 따로 떼어놓고 본 게 아니라 삶과 연결 지어 보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이 또한 불이다.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이라는 구절도 삶도 죽음과 만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삶과 죽음, 차안(此岸)과 피안(彼岸)...그것들이 별개의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의 깨달음을 강조하기 위해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이라고 재차 덧붙이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 작품을 되풀이해서 읽다보면 시적 감흥보다는 깨달음이 먼저 와 닿는 것도 삶과 죽음이 불이라는 불교 교리의 뼈가 너무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는 물음은 시구가 아니라 불가의 선문답처럼 들리기도 한다.
고은은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불이를 지향했던 것 같다. 1960년 첫 시집으로 ‘피안감성(彼岸感性)’을 펴낸 데서 보듯 불교의 깨달음으로 시작의 토대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유신독재 및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가 1980년엔 김대중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사건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부터는 사회참여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보면 하나도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개인적 깨달음이 사회적 깨달음으로 확대됐다고나 할까, 고은 시의 껍데기만 본 사람들은 1986년부터 발표하여 2009년 최종 탈고한 총 30권 4001편 짜리 연작시집 ‘만인보(萬人譜)’와 비슷한 시기 완성된 대서사시 ‘백두산’을 고은의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민족의 큰 시인’이라고 추켜세우지만 고은 시의 알맹이까지 꼼꼼하게 살펴본 사람들은 ‘문의 마을에서의 개인적 깨달음’이 ‘독재치하에서의 사회적 깨달음’으로 이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토를 달지 않으리라 믿는다. 고은 자신도 그걸 부인하지 않는다는 듯이 최근 들어서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과 같은 깨달음의 시로 회귀하고 있음을 본다. 결국은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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