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1일 토요일

그대에게-자기마저 속이려는 남과 여의 삼바









그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으로 
소유하려는 것조차 
나의 욕심이라고 깨닫고 
시인하며 
가슴을 털며 돌아서면 
사랑은 조건이 없는, 아니 
진정한 사랑의 조건은 
진실, 
그 하나만으로 족한 것. 
가면의 사랑으로 우리는 
자기마저 속이려는 숱한 
가여운 영혼을 본다 

사랑 없는 삶은 
죽음보다 무의미한 것이기에 
우선은 
내 마음의 진실을 찾아 
아픈 추억들 뒤지고 있다.

                 <‘홀로서기2-점등인의 별에서’(청하, 1987), 서정윤(徐正潤): 1957년-> 

가 내린다. 이런 땐 언제나 낯선 땅 뉴욕일망정 창밖을 내다보며 x폼을 잡아야 한다. 어젯밤의 자욱한 안개로도 풀어지지 않은 슬픔들이 벌거벗은 나무 가지마다 방울방울 맺힌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슴 속 이리 저리 흩뿌려지는 추억들, 멀리서 플러싱 가는 7번 전철은 아무런 생각 없이 데그덩데그덩 굴러가고, 유령처럼 모퉁이를 돌아가는 가구점 배달 트럭...새삼 온기가 그리워진다. 쓰디쓴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다. 그랬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있었고 여자에게는 남자가 있다. 슬픔을 잊으려 사랑하지만, 사랑 때문에 슬퍼진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그런 남(男)과 여(女)가 반드시 어딘가에 있으리라. 

1966년 스물아홉 살짜리 프랑스 영화감독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도 그런 남과 여를 찾아냈었다. 직접 각본을 쓰고, 핸디카메라로 촬영, 3주 만에 편집까지 마쳤다는 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에서 슬픈 추억에 발목이 잡혀 고독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남과 여를 맺어줬었다. 스턴트맨 남편을 잃은 30대의 미망인 안은 딸 프랑수아의 문제로 학교에 갔다가 아내가 자살한 자동차 경주 선수 장을 만난다. 사랑은 거짓말, 파리행 기차를 놓친 안이 장의 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오는 길, 죽은 남편에 대해 묻는 장에게 안은 남편이 배우이며 가수이자 시인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차창 밖을 내다본다. 추억에 잠긴다.....본능과 고독의 충동에 못 이겨 함께 몸을 섞지만 결국 여자는 남자를 남겨두고 홀로 기차에 오른다. 그러나 여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은 남자가 역에 먼저 도착해 여자를 기다린다. 여자가 거짓말로라도 자신의 사랑을 충족시키려는 일탈을 불사한 반면 남자는 그런 거짓말의 일탈을 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긴다. 사랑을 확인한다....빨강, 노랑, 청색의 모노크롬 화면과 대사 없이 표정과 동작만으로 상황을 처리하는 등 시적으로 절제된 영상을 프랜시스 레이의 음악이 포근하게 감싼다. 

1987년 청하에서 펴낸 서정윤의 시집
'홀로서기 2- 점등인의 별에서'
남자와 여자는 사랑하는 방식도 다른가? 다른 것 같다.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을 보내면서 문학성보다는 감성에 매달렸던 대구 출신의 시인 서정윤(徐正潤: 1957~ )도 남녀 간의 사랑방식 차이에 대해 꽤나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에 관한 인식의 차이에 무척이나 실망이 컸던 것 같다.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그 여자의 ‘진실’이 뭔지 확신하지 못해 고뇌하고 있음을 본다. “가면의 사랑으로 우리는/ 자기마저 속이려는 숱한/ 가여운 영혼을 본다”느니 “내 마음의 진실을 찾아/ 아픈 추억들 뒤지고 있다”고 토로하는 대목에서는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는 여자의 진실과 여자가 진실로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남자의 진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독단마저 읽혀진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던 시인 류시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서정윤이 지난 2013년 재직 중이던 대구영신중학교에서 제자 성추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벌금 1000만원과 40시간의 성폭력치료프로그램 수강을 선고받은 사건도 ‘사랑의 진실’을 확신하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사건이 터지자 서정윤은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약간의 신체적 접촉만 있었을 뿐 성추행은 아니었다”라고 주장했지만 2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3학년 A양에게 “진학 상담을 좀 하자”며 교사실로 부른 뒤 몸을 껴안고 볼과 입술에 수차례 입을 맞추었는가 하면 “가슴이 얼마나 컸는지 만져 봐도 되나요?”하고 치근댔던 사실까지 까발려져 말 그대로 개망신을 당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사춘기 여학생들이 푹 젖어드는 감성적인 시를 계속 써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서정윤이 사랑의 진실에 허기진 남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만도 아닌 듯싶다. 낼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시인이 열댓 살 먹은 소녀와의 성애를 탐했다기보다는 사랑의 진실을 찾지 못하고 방황만 해온 ‘가여운 영혼’의 일탈이 아니었나 싶다. 서정윤 자신이 그의 출세작으로 꼽히는 ‘홀로서기’에서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고 예견(?)했듯이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여자를 찾다가 지친 나머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서정윤을 두둔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이해해주고 싶다. 

남과 여,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는 여자, 여자의 진실을 갖고 싶어 하는 남자, 인터넷에서 ‘서정윤 시인’을 검색해보면 ‘홀로서기’보다는 ‘여중생 제자 성추행’이 더 많이 떠오르고 있는 지금 한때의 베스트셀러 시인 서정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랑? 진실?....그것도 아니면 아픈 추억을 뒤적이면서 홀로서기? 어느 새 커피가 식어버렸다. 피에르 바슐레(Pierre Bachelet)가 불렀다는 영화 주제곡 ‘남과 여의 삼바’를 다시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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