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문학과지성사), 최승자(1952년 ~ )>
프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년~1893년)이 1883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Une Vie)을 읽다보면 “도대체 인간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하느님은 어디서 자빠져 낮잠을 자고 있느냐”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착하고 청순하기 짝이 없는 노르망디 귀족의 딸 잔느는 줄리앙 자작과 결혼하지만 이내 환멸과 비애를 느낀다. 난봉꾼이었던 줄리앙은 잔느의 몸종 로잘리를 건드려 아이를 낳게 하고도 모자라 백작 부인과 간통을 하다가 발각되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또 잔느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정숙한 여인의 귀감으로 여겼던 어머니가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 남편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세상에 대해 더 없는 환멸을 느낀다. 외아들 폴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보지만 폴 마저 창녀와 함께 살면서 가산을 탕진하는 등 잔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
모파상이 세상에 대한 환멸과 생에 대한 배신감, 솟구치는 비애로 뒤범벅된 그런 작품을 쓴 데 대해 사람들은 “모파상이 신경질환을 앓고 있었던 데다가 다작으로 인한 피로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인해 염세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지만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에 주목하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은 다르다. 모파상이 여성의 일생을 남성의 시각으로만 관찰했기 때문에 여자의 불행조차 ‘남자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모파상 자신은 여권의 시장을 위해 그런 작품을 썼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기실은 여자의 일생이 남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강조한 지독한 성 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일견 틀린 지적은 아닌 것 같다. 여성차별을 하지 않으려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시각이나 사회적 편견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모파상 살아생전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돋보기를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의 일생’이라는 소설또한 페미니즘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1883년 모파상이 한 잡지에 발표한 후 단행본으로 엮어진 게 일본에 소개될 때 ‘여자의 일생’이라고 번역됐고 그걸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이 고스란히 베껴 한반도에 소개함으로써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 원제는 ‘Une vie’ 또는 ‘L'Humble Vérité’로서 ‘어떤 인생’ 또는 ‘비천한 진실’이었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비천한 진실’ 사이의 거리는?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나온 후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최승자(1952년~ )에게 물어보면 “가깝고도 멀다”는 아리송한 답변을 내놓을 것 같다. 등단하자마자 드물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던 최승자는 등단 초기 당시 한국사회의 흐름과 맞물려 페미니즘을 시작의 주제로 삼았었다. 지금도 한국문단에서는 페미니즘을 논할 때마다 ‘최승자’라는 이름을 빠짐없이 등장시킨다. 그러나 최승자의 페미니즘은 8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던 바,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즉 남성 우위 사회에 대한 반동적인 페미니즘을 내세울 때 최승자는 남성이라는 거울에 비춰본 여성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여성성을 확인하려고 시도했었다. 최승자의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작품 ‘여성에 관하여’에도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죽음과 탄생, 죽음은 수정되지 않은 난자(卵子)의 종말, 탄생은 수정되어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태아, 여자의 몸이 삶과 죽음의 발원(發源)이라는 통찰로 여성성의 근원(根源)을 찾고 있음을 본다. 여성성이야말로 인간의 모태이자 삶과 죽음의 뿌리라는 것이다.
201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최승자의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
모파상의 ‘비천한 진실’과 최승자의 ‘여성에 관하여’ 사이의 거리는? 역시 가깝고도 먼 것 같다. 남성의 눈으로 여성의 삶을 관찰했던 모파상은 인간의 삶에 대해 지독한 회의를 느껴 자살을 시도한 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1893년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여성의 눈으로 여성성을 관찰했던 최승자 또한 2001년 이후 정신분열증으로 시달려오면서 육체적으로는 집과 병원을 오가고 정신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지난 해 자신의 근황을 담은 새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건재(?)함을 알렸지만 페미니즘은 썰물처럼 빠져나고 그 빈자리를 생에 대한 관조로 채우고 있음을 본다. "나는 죽은 시계/세계가 노자 時 장자 分에 멈춰 있다/장자가 無라면 노자는 虛다/장자가 소설가라면 노자는 시인이다/꽃잎들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보인다"('죽은 시계' 전문)라는 작품에서 보듯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슨 생각을 하다가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았다는 듯이 페미니즘도 삶의 아픔과 슬픔과 고뇌도 초월하려고 애쓰고 있는 게 뚜렷이 감지된다.
'여성' 최승자보다는 '시인' 최승자로 바라보고 싶다. 최승자 또한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활동해왔지만 결국은 인간 아무개로 회귀하는 건 아닌지?! 그게 여자가 아닌 인간의 ‘비천한 진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자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고독과 불안과 슬픔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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