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시선집’(산호장, 1955), 박인환(朴寅煥:1926~1956)>
사 람은 왜 우울(憂鬱)해질까? 의학과 과학이 별로 발전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동서양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했던 것 같다. 근심 우(憂)는 원래 머리 혈(頁)과 마음 심(心)과 머뭇거림을 뜻하는 뒤져서 올 치(夂)가 합쳐진 것으로서 머릿속의 어떤 생각이 마음을 짓눌러 뒤처지는 것을 말한다. ‘우울’을 뜻하는 영어 ‘depression’의 뿌리도 ‘내리 누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deprimere’다. 그러나 심장도 바꿔치기 하는 요즘의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마음의 감기'로도 불리는 우울증에 관해 아직도 ‘당사자의 정신적 의지’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의학자들은 ”감정을 조절하는 뇌의 기능에 변화가 생겨 발생하는 생리학적·해부학적 문제로서 부정적인 감정은 그런 변화에 따른 결과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세로토닌(serotonin)과 멜라토닌(melatonin), 도파민(dopamine),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등 신경과 관련된 여러 가지 호르몬이 우울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뇌를 순환하면서 신경 전달 기능을 수행하는 신경대사물질 세로토닌은 데 감정 표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바, 이 물질이 부족하면 감정이 불안정해서 근심·걱정이 많아지고 충동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2배 정도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세로토닌 수치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월경 주기를 전후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등 여성 호르몬의 불균형이 뇌를 자극하여 세로토닌 분비에 변화를 야기하는 바, 세로토닌의 농도가 조금만 변해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 등 여러 신체적·심리적 변화를 겪으면서 생리 전 불쾌 기분 장애, 산후 우울증, 폐경기 우울증 등등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1941년 4월 3일 울프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1면에 게재한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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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픈 울프(Adeline Virginia Stephen Woolf: 1882~ 1941)도 꽤나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1895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데 이어 1904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두 번째 정신 이상증세를 보이면서 투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선천적으로 정신병(精神病, mental disease)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킹스 칼리지 런던(King's College London)에서 역사학과 그리스어를 공부한 데 이어 1912년 레오나드 울프와 결혼한 후에는 ‘항해(1915)’ ‘밤과 낮(1919)’ ‘댈러웨이 부인(1925)’ ‘등대로(1927)’ ‘올랜드(1928)’ 등등을 발표하면서 필명을 떨쳤고 1906년부터 1930년경까지 런던 중심가 대영박물관 근처의 블룸즈버리(Bloomsbury)에서 소설가 E. M. 포스터, 전기작가 리턴 스트레이치, 미술평론가 클라이브 벨, 화가 버네서 벨과 던컨 그랜트,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등과 어울리면서 당대의 지성을 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부모의 죽음과 어린 시절 의붓오빠들로부터 받은 성적 학대 등으로 인한 충격을 채 극복하기도 전에 세상에 대한 환멸과 불안과 고독이 그녀의 정신을 짓밟아 눌렀고 평생 우울증과 맞서 싸우다가 끝내는 1941년 3월 28일 코트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우즈 강(River Ouse)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하고 만다.
지금도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한 여류지성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래서 미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가 1962년 브로드웨이 무대 위에서 초연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류 지성의 고뇌를 떠올렸지만 기실 그 작품은 버지니아 울프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 당초 극중에 1933년 개봉되어 히트 친 디즈니 영화 ‘아기돼지 삼형제(Three Little Pigs)’의 노래 ‘누가 크고 못된 늑대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the Big Bad Wolf?)’를 차용하려 했으나 저작권 문제가 불거지자 다른 노래에 ‘the Big Bad Wolf’와 어감이 비슷한 ‘Virginia Woolf’를 넣어 가사를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몰랐던 많은 관객들이 ‘Virginia Woolf’라는 이름에 끌려 표를 샀다고 전해지는데, 그 연극이 큰 성공을 거두자 1966년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 감독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차드 버튼 주연의 동명 영화를 만들어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하기도 했다. 우울한 여류지성 버지니아 울프가 자신과는 동떨어진 세계인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이용(?)당한 데 대해 실소가 머금어지기도 한다.
생전의 박인환 시인(왼쪽)과 1955년에 펴낸 '박인환 시선집' |
우울한 사람은 우울한 사람이 더 잘 이해한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사회의 우울한 지성들이 버지니아 울프를 벗 삼았던 것도 그런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항상 우울하여 최면·진정·항경련(抗痙攣) 작용이 있는 페노바르비탈(phenobarbital)에 의존했다는 시인 박인환(朴寅煥:1926~1956)도 버지니아 울프를 꽤나 좋아하여 그녀의 작품을 탐독했던 것 같다. 그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인 ‘목마(木馬)와 숙녀(淑女)’를 읽다보면 그가 버지니아 울프를 짝사랑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이 작품에서의 키워드들 중의 하나는 목마, 목마는 세상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어른들이 아니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들의 놀이도구, 버지니아 울프 같이 여리고 순수한 영혼은 생의 우울과 고독과 허탈감을 수용하지 못한 나머지 세상을 등지고 말았을 거라는 행간이 읽혀진다. 작품 중간의 ‘……등대(燈臺)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1927년에 발표한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 )’에서 따온 듯,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라는 자문(自問)에서는 자신 또한 목마를 타고 떠난 버지니아 울프의 뒤를 따라갈 거라는 우울한 예고가 감지된다. 실제로 박인환은 이 시를 쓴 후 얼마 되지 않아 페노바르비탈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삶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가? 사람이 우울해져서 삶이 우울하게 느껴지는 건가? 버지니아 울프와 박인환이 환생하여 정신과 의사들과 논쟁을 벌인다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우울증이 버지니아 울프를 잡고 박인환을 잡고 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을 잡고 있지만 동서고금의 애송시 들에서 우울을 걷어내면 맹숭맹숭하기 짝이 없는바 우울증 또한 삶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시 또한 우울할 때 읽어야 제 맛이 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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