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여자―역사란 무엇인가 · 1
강남의 술집은 음습하고 황량했다
얼굴에 ‘정력’을 써붙인 사람들이
발정한 개처럼 낑낑대는 자정,
적막강산 같은 어둠 속에서
여자는 알몸의 실오라길 벗었다
강남 일대가 따라 옷을 벗었다
아득히 솟은 여자의 유방과
아련히 빛나는 강남의 누드 위로
당당하게
말좆 같은 뱀이 기어올랐다
소름을 번쩍이며
좆도 아닌 것이
좆 같은 뻣뻣함으로
여자의 젖무덤을 어루만지고
강남의 목아지를 감아 흐느적이고
여자의 입에 혀를 널름거리고
강남의 등허리를 기어내리고
태초의 낙원
여자의 무성한 아랫도리에 닿아
독재자처럼 치솟은 대가리를
강남의 아름다운 자궁에 박았다
여자는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고
강남의 불빛이 일시에 꺼졌다
적막강산 같은 무덤 속에서
해골뿐인 남자가 비루하게 속삭였다
뱀은 남자의 좆이야
이브의 유혹도 최초의 좆이었지
해골들이 하하 쳐드는 술잔에
뱀의 정액이 넘쳐 흘렀다
도처에 페스트가 들끓고 있었다
강남의 흡혈귀가 조용히 웃었다
놔먹인 땅에 이제 칼과 창이 필요했다
아무데나 기어드는 뱀의 대가리에
휙 휙 내리치는 해방의 칼
하얗게 빛나는 흡혈귀의 아가리에
쭉쭉 꽂히는 자유의 죽창
<‘지배문화, 남성문화’ 제4호(1988). 고정희(高靜熙: 1948~1991)>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아마데우스’로 두 번이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밀로스 포먼 감독이 연출한 영화 ‘국민 대(對) 래리 플린트 소송’(The People vs. Larry Flynt)에서 저질 포르노 잡지 ‘허슬러’로 떼돈을 모은 주인공 래리는 말한다....살인은 불법이다. 그러나 살인 장면을 찍은 사진을 뉴스위크에 실으면 퓰리처상을 받는다. 섹스는 누구나 하는 합법적인 행위이지만 그걸 잡지에 실으면 감옥에 간다. 섹스와 살인, 어느 게 더 나쁜가?...굳이 래리 플린트의 교묘한 항변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포르노처럼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드물다. 포르노는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의 뒤쪽 절반을 잘라낸 말로 “인간의 성적 행위의 사실적 묘사를 주로 한 문학·영화·사진·회화”를 말한다. 어원이 “창녀(porno)에 관하여 쓰인 것(graphos)”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ornographos’인데서 보듯 처음엔 호색문학(好色文學)만을 의미했지만 영화나 사진 등으로 개념이 확산되면서 ‘obscence’ 내용을 담은 것들을 총칭하게 됐다. ‘obscence’은 ‘scene(무대) 밖의 것’ 즉 무대에서는 보일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추잡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건 옛날 이야기, 성 해방시대가 도래한 지금 포르노를 ‘더럽고 추잡한 것’으로 고집하는 사람들은 줄어든 반면 나름대로의 효용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에로틱한 심상(心像)을 야기함으로써 심리적 최음제 역할을 한다든지, 가상의 성욕 충족으로 성범죄를 감소시킨다든지, 날이 갈수록 포르노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는 추세다. 1968년 미국서 19명의 권위자와 20명의 스태프로 ‘외설과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위원회’를 발족시켜 “성에 대한 흥미는 극히 당연한 것으로 건강에도 이로우며, 포르노그래피 문제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성에 대하여 보다 솔직하고 대범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한 것도 그 같은 추세가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1983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고정희 시집
'이 시대의 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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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에 관한한 한국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이중적인 것 같다. 내가 하면 순결한 로맨스, 남이 하면 더럽고 추잡한 짓, 시인들 또한 이중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민주화가 막 꽃 피기 시작한 것과 맞물려 페미니즘(feminism)의 물결이 거세게 일던 1980년대 여성 시인들이 섹스를 여성 수탈의 상징으로 매도한 것도 그런 이중적 태도의 부작용(?)으로 보인다. 전남 해남 출신으로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YWCA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가정 법률 상담소 출판부장 등을 지내면서 여권신장운동에 앞장섰던 시인 고정희(高靜熙: 1948~1991)도 그런 ‘부작용’을 전혀 눈치재치 못했던 것 같다. 고정희가 1988년 ‘지배문화, 남성문화’ 제4호에 발표한 ‘뱀과 여자―역사란 무엇인가 · 1’를 보면 여성에게 있어서 섹스는 천형 또는 저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기독교 성경의 영향 탓을 감안하더라도, 통상의 섹스라는 게 남녀 쌍방의 합의(?)하에 이뤄진다는 것을 잠시 까먹었다는 듯이, 싫든 좋든 인류는 섹스를 통해 번식한다는 사실은 도외시한 채, 남성의 쾌락추구로만 매도하고 있음에 페미니즘에만 치우친 나머지 객관적인 균형감각을 상실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페미니즘의 본질을 남성비하나 남성공격으로 착각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섹스를 탐하는 남성을 ‘발정하여 낑낑대는 개’로 몰아붙이는 것도 모자라 남성의 성기를 ‘말좆 같은 뱀 대가리’에 비유하면서 “아무데나 기어드는 뱀의 대가리에/ 휙 휙 내리치는 해방의 칼/ 하얗게 빛나는 흡혈귀의 아가리에/ 쭉쭉 꽂히는 자유의 죽창”이라고 마감하고 있음에 남성에 대한 섬뜩한 적개심마저 느껴진다. 음습하고 황량한 강남의 술집에서 섹스를 거래하는 인간들이 비루할 따름이지 섹스 자체가 원래 비루한 것은 아니잖은가?! 에덴의 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먼저 따먹은 것은 아담이 아니라 이브였고,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도 금단의 열매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걸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신학대학 출신 시인이 섹스를 더럽게 즐기는 사람들보다도 섹스 자체를 죄악시한 데 대해서는 실소가 머금어진다.
여자가 ‘남자의 좆’을 언급하면 페미니즘 운동이 되고 남자가 ‘여자의 xx’를 입에 올리면 외설로 받아들였던 당시 한국사회의 수준도 낯간지럽다. 고정희 시인이 ‘뱀과 여자―역사란 무엇인가 · 1’를 발표하고 나서 3년 뒤쯤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 사고로 작고했던 1991년 연세대 국문과 교수 마광수가 주인공 ‘나사라’가 대학교수 ‘한지섭’과 음란(?)한 성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의 여성잡지 연재소설을 단행본으로 묶어냈다가 검찰에 구속된 후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연세대 교수직에서도 쫓겨났던 필화사건을 떠올리면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에서 “성난 남근이 내 팬티를 뚫는다. 아니 뚫는 게 아니라 팬티가 마치 콘돔처럼 남근을 감싸고 나의 성기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팬티가 주는 이질감 때문에 더욱 흥분한다”고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은 음란외설이고 고정희가 “좆도 아닌 것이/ 좆 같은 뻣뻣함으로/ 여자의 젖무덤을 어루만지고/ 강남의 목아지를 감아 흐느적이고/ 여자의 입에 혀를 널름거리고...여자의 무성한 아랫도리에 닿아/ 독재자처럼 치솟은 대가리를/ 강남의 아름다운 자궁에 박았다/ 여자는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고/ 강남의 불빛이 일시에 꺼졌다”고 읊은 것은 페미니즘이라고 포장했던 평론가들의 이중적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1994년 일본에서 번역·출간된 ‘즐거운 사라’는 일본에 소개된 한국 소설들 중에서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된 가운데 일본 언론과 비평계는 “여성의 주체적 프리섹스를 옹호한 한국 최초의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칭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희를 “한국 문단에 페미니즘의 꽃을 피운 시인”이라고 추켜세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즐거운 사라’를 단순한 음란소설로 규정하면서 여성을 비하했다고 호되게 비난했었다.
화가가 그린 누드화를 보고 성욕을 느끼면 포르노가 되고 아름다움을 느끼면 예술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마찬가지로 시 감상에 관한 한 시는 쓴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것이라는 상식 아닌 상식도 다시 곱씹혀진다. 고정희는 시인보다는 페미니스트로서 더 큰 성공을 거뒀던 것 같다. 여성운동가로서의 성취는 존중하지만 시인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가 않다는 말이다. 고정희의 ‘뱀과 여자―역사란 무엇인가 · 1’ 또한 여러 번 읽어봐도 성욕은 느껴지지 않으므로 포르노는 아닌 것 같고, 기독교 성경 창세기 한 부분을 어설픈 페미니즘으로 풀어쓴 것처럼 보이는 바, 래리 플린트에게 물어봐도 “‘좆도 아닌 것이/ 좆 같은 뻣뻣함으로’? 포르노도 아닌 것이 포르노 흉내를 냈다”고 고개를 가로 저을 것 같다. 고정희가 여성운동과 시작(詩作)을 분리했더라면 더 훌륭한 여성운동가로서의 족적을 남기고 더 훌륭한 시인으로서의 작품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참고로, 고정희 시인의 시세계 일람을 위해 시집들을 발간연도 순으로 정리해 둔다.
1979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평민사
1981 <실락원> 인문당
1983 <초혼제> 창작과 비평사
1983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86 <눈물꽃> 실천문학사
1987 <지리산의 봄> 문학과 지성사
1989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창작과 비평사
1989 <Sister's We Are the Path and the Light> 둥지
1990 <광주의 눈물비> 동아
1990 <여성해방출사표> 동광출판사
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 들꽃세상
1991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2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 비평사(유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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