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일 수요일

추풍인(秋風引)-가을 타는 남자의 술래잡기


秋風引(추풍인) 

何處秋風至(하처추풍지)  어느 곳에까지 가을바람이 왔나? 
蕭蕭送雁群(소소송안군)  소소 불어 기러기 떼 보내더니 
朝來入庭樹(조래입정수)  아침에 정원 나무를 흔들어대는데 
孤客最先聞(고객최선문)  외로운 나그네가 제일 먼저 듣네 

                                               <유우석(劉禹錫); 772년-842년> 

월과 함께 술래잡기 놀이하는 것 같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셀 동안 아니 그것도 귀찮으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따위의 열 글자짜리 구절을 외울 동안 살금살금 다가와 뒷등을 탁 치고 달아나는 놀이 말이다. “이젠 진짜 가을이구나” 하는 말을 그치자마자 낙엽들이 뒷등을 탁 치고 달아나는 것 같다. 10월 들어 두 번째 맞은 휴일 오후, 낙엽에게서 등을 얻어맞은 분함을 풀기 위해 한시(漢詩) 모음집을 꺼내 두 눈 꼭 감고 점 보듯이 아무 데나 펼치자 당(唐)의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이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 술래놀이를 하느냐?”는 듯이 허허로이 웃는다. 가을바람이 어디까지 왔느냐고? 외로운 이민자의 귓전에까지 근접한 것 같다. 소소(蕭蕭) 바람 소리가 들린다. 의뭉 떨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기실 그 소소 바람 소리를 제일 먼저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맨 처음 이사 왔을 때 값싼 코압(Co-Op) 아파트일망정 수목이 울창한 ‘잉글리시 가든(English Garden)’이 있는 것을 망외의 기쁨으로 여겼건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갈수록 그게 형장(刑場)으로 바뀔 줄이야! 아무리 오지 말라고 손을 내저어도 가을은 왔고, 매해 여름 무성한 욕망(慾望)으로 하늘을 덮던 플라타나스 잎들이 우수수 떨어질 때마다 자포자기(自暴自棄)와 미련이 교차하면서, 서늘한 가슴앓이가 도지곤 했다. 분수대 주변에 심겨진 팬지들의 꽃잎도 말라비틀어지고, 관리소 직원들을 약 올리듯이 웃자라던 잡초들 또한 시큰둥하게 누워 텅 빈 하늘이나 바라보고,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온 듯 중국집 배달부가 이 쪽 저 쪽을 오가며 아파트 이름을 확인할 때 가난한 이민자의 권태로운 일상(日常)이 문득 초라해지면서 내 것이 아닌 듯 서먹서먹해지는 것이었다. 

그랬다. 가을은 오지 말라고 손을 내저어도 막무가내로 왔다. 잉글리시 가든을 뒤덮고 있던 초록이 커피색으로 짙어갈 즈음이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을 준비하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건 나무들도 마찬가지, 소소 바람이 불면 잎의 양분이 줄기 쪽으로 옮겨가 엽록체가 분해되어 녹색을 잃고, 그와 동시에 잎자루 기부(基部)에 이층(離層)이 형성되고, 이층 세포의 접착력이 약해지면 잎이 탈락하게 되는 것을 골백번도 더 경험했건만 매번 처음 겪는다는 듯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안쓰럽기 짝이 없다. 나이 먹을수록 남성 호르몬이 늘어났는지 대범해져가는 아내는 “나무가 알기는 뭘 알겠어요? 감정 이입이 지나친 거 아닌가요?” 하고 배시시 웃지만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하면서 소소 바람 불 때마다 서걱이는 나뭇잎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지 끝에 매달려 있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모양을 그저 그런 자연(自然)으로 무심히 바라볼 수가 없다. 

하긴 자연이 그렇고,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면, 더 말해서 무엇 하랴. 지난 여름 동안 같은 나ant가지에 매달려, 사랑을 속삭이고, 우정을 나누며, 꿈과 희망을 키워왔으면서도 안녕이란 말 한마디 없이 미련과 자포자기로 헤어져버리는 무정(無情)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진다. 미련과 자포자기? 그러고 보니 참 익숙한 한 쌍의 노리개 같다. 그것들은 이룬 것도 없이 아랫배의 기름기만 부풀려가면서 달력의 숫자들을 징검다리 삼아 세월을 건너뛰고 있는 중년남자가 손바닥 피를 잘 돌게 한답시고 주물럭거렸던 한 쌍의 호두알 같은 것이었다. 누구는 낙엽을 태우면서 풍요(豊饒)와 윤택(潤澤)의 기억을 떠올렸다지만 뭔가 이룩해보려고 항상 쫓기듯이 살아온 이민자에겐 차마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부끄러이 실토한다. 그래서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부끄러움 하나, 어느 덧 ‘가을을 타는 남자’가 돼버렸다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다. 

엊그제 서울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거기서도 미련과 자포자기의 낙엽들이 어지러이 엇갈리고 있었다. 모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있는 친구는 “회사에서 용도 폐기당할 것 같다. 이제 떨어져나갈 날이 머지 않았다”며 술에 절어있었고, 사업에 성공하여 돈 좀 벌었다는 친구는 제까짓 놈이 늙으면 얼마나 늙었다고 청춘(?)을 되살리겠다며 열댓살 연하의 아가씨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다가 가정파탄과 부도를 맞았다고 했고, 학창 시절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허구한 날 데모만 하던 친구가 아직도 국회의원 배지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차기 총선이야말로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며 정계 실력자 뒤꽁무니를 졸래졸래 따라다니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삶이란 다 그런 것인가?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왜 그다지도 서글프게 전개되는 것일까? 손에 든 커피잔이 온기를 잃어간다. 뜨거운 것이 식어가는 것처럼 허망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그게 아닌데...왜 이렇게 가을을 타는지 모르겠다. 어느 곳에까지 가을바람이 왔느냐고? 가슴 속 깊숙한 곳에까지 불어든 것 같다. 

상해고적에서 펴낸
유우석 전집 표지
중국 당(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년-842년)은 꽤나 자존심이 강했던 것 같다. 강서성. 오군(吳郡) 출신으로서 한(漢)나라 때 중산(中山)의 정왕(靖王) 유승(劉勝)의 자손임을 자칭했었지만 기실은 흉노족의 후예로 조상이 북위(北魏) 때 낙양(洛陽))으로 옮겨왔다는 게 정설, 혁신을 주장하던 왕숙문당(王叔文黨)에 가담했다가 805년 9월에 연주(連州 자사(刺史)에 좌천되었다가 10월에 다시 낭주(朗州) 사마(司馬)로 옮겨졌지만 시를 쓸 때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었다. 매해 가을이면 울적해져서 계집아이처럼 온갖 청승을 다 떠는 중년의 이민자와는 달리 아무리 불우한 처지에 처하더라도 의젓하고 굳건한 자세를 견지했었다. 그의 시작(詩作)들이 ‘담백하면서도 오묘한 맛’을 내는 것도 그런 자존심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말년에 시를 주고 받으며 교유했다는 백거이(白居易)가 감상(感傷)으로 시를 썼다면 유우석은 절제(節制)로 시를 썼다. ‘추풍인’도 그런 류의 하나다. 가을이 되어 심사가 처량해지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소소 불어 기러기 떼 보내고’라든지 ‘아침에 정원 나무를 흔들어대는데’로 대신하는 절제가 돋보인다. ‘가을바람이 어디까지 왔나?’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외로운 나그네가 제일 먼저 듣는다’라고 남의 말 하듯 자신의 속내를 슬그머니 내비치는 유우석에게 한 수 잘 배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