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5일 일요일

정든 유곽에서 - 일부러 어렵게 쓴 시 쉽게 읽기


정든 유곽에서


1

누이가 듣는 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잡이 들었다

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韓族의 별

                               <1977년 ‘문학과 지성’ 겨울호, 이성복(李晟馥); 1952년- >


세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국어사전에서 ‘난세’를 찾아보면 한자어 ‘亂世’를 병기해놓고 “전쟁이나 무질서한 정치 따위로 어지러워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전쟁’이나 ‘무질서한 정치’ 따위를 빼고 ‘살기 힘든 세상’을 말할 때는 ‘난세(難世)’가 더 적확하다. 실제로 중국인들은 ‘亂世’와 ‘難世’를 섞어 쓴다. 한자 어려울 난(難)은 진흙 근(堇)에 꽁지 짧은 새 추(隹)가 붙어 만들어진 것으로서, 진흙에 빠진 새는 헤쳐 나오기 힘들어서 ‘힘들다’ ‘어렵다’ 등의 의미로 쓰이게 됐다. 반면 영어 ‘difficult’의 뿌리는 ‘쉬운’을 뜻하는 ‘facilis’ 앞에 부정(否定)을 뜻하는 접두사 ‘dis-’가 붙어 만들어진 라틴어 ‘difficilis’로서 ‘難’보다는 어렵지 않다. 미국인들은 ‘어렵다’라고 표현할 때 발음하기 어려운(?) ‘difficult’보다는 ‘hard’를 더 많이 사용하는데, ‘hard’의 뿌리는 ‘지나친’ ‘매우’ 등을 뜻하는 고대 고지독어 ‘harto’로서, 상식보다 지나치면 ‘어려워진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쉬운 게 이 세상의 삶, 그 때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모아놓고 “그 땐 참 살기 힘들었다”고 이마에 주름살을 잡았지만,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런 말을 했었고 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런 말을 했었던 바, 당대(當代)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살기 힘든 세상’은 당대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왜? 삶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니까. 또 난세일수록 ‘유곽(遊廓)’이 번창한다. 난세에 혼자 힘으로 벌어먹기 살기 어려운 여자들이 섹스를 팔고 먹고 살기 위해 매일 매일 전투를 치러야 하는 남자들이 쌓이고 쌓이는 긴장감을 풀기 위해 섹스를 산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도 웅변한다.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한 가운데 전사한 남편과 오빠 대신 생계를 떠안은 여자들이 서울의 역전 언저리로 모여들어 거대한 유곽을 형성했다는 것을 나이 먹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 안다. 청량리역 옆 588, 서울역 앞 양동, 용산역 앞 쪽방촌, 영등포역 골목 홍등가....티켓다방, 퇴폐 이발소, 안마시술소, 러브호텔....먹고살만해진 지금 성매매 특별법이 어쩌고저쩌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일 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곽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1980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이성복 시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난세에는 시인들도 시를 어렵게 쓰는 것 같다. 시인들에게 있어서의 난세는 전쟁이나 사회적 갈등이나 가난 따위로 인한 난세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할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을 때가 난세, 경상북도 상주 출신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년- )이 서울대 불문과 재학시절 쓴 것으로 추측되는 ‘정든 유곽에서’를 보면 일부러 어렵게 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슨 말을 하고는 싶은데 차마 할 수 없을 때 나오는 넋두리 같기도 하다. 그것도 아니면 술에 취해 횡설수설 아무 이미지들이나 짜 맞추려는 이미지스트 같기도 하고. 당시 그의 난해시에 대해 평론가들은 “별종이어서 ‘관습 평단’의 기대를 무너뜨렸다”느니 “그에 대한 마땅한 비평적 척도가 없다”는 등 매우 난해한(?) 평으로 일관했지만, 아버지 세대 사람들이 “그 때는 참 살기 힘들었다”는 아버지 말을 쉽게 이해하듯이, 이성복 세대는 의외로 이성복의 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10월 유신의 ‘유’자만 비난해도 붙잡아 가던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에, 먹고살기 위해서는 죽는 것 말고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두 눈 번득이는 사람들이 즐비했던 난세(難世)에, 시인이 쓸 수 있는 것이라곤 난해한 ‘넋두리’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왜? 그 때엔 자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면 피차 서로 좋지 않았을 거니까. 그런 ‘넋두리’를 논리적으로 풀어 이름값을 하려고 덤벼들었던 당시의 평론가들이 되레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서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지금까지 계명대 강단에 서온 덕분에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이성복의 근작시들이 예전과는 달리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난해시를 감상할 때 자구(字句) 하나하나 뜻을 새겨가며 읽으려고 덤벼드는 것은 암호문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 세상을 참 어렵게 산다는 눈 흘김을 받아 마땅하다. 적어도 시에 관해서는 해석이 어려울수록 쉽게 접근해야 하고 해석이 쉬울수록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성복이 시를 일부러 어렵게 썼던 것은 세상만사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흑백논리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시구 하나하나가 아닌 시 전체의 이미지로 사회의 부조리를 까발리고, 굴종을 강요하는 전통과 관습을 부정하기 위해 사물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예시하면서, 나름대로의 다양성을 모색하지 않았나 싶다. 이성복보다 50여년 먼저 태어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의 조선사회에서 숨쉴 구멍을 찾기 위해 난해시를 썼던 시인 이상(李箱)과도 닮았다. 이상이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너무 난해하다는 항의가 빗발쳐 중단했다는 ‘오감도’(烏瞰圖)를 다시 읽어보면 오늘 다시 읽어보면 너무 쉽다는 느낌이 들듯이 이성복의 시 또한 먼 훗날 다시 읽어보면 쉽게 읽힐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 왜? 세상은 날이 갈수록 난세(難世)로 변해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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