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9일 일요일

갈대 – 현존재(現存在)의 자각(自覺)

시인 신경림이 본 ‘갈대’는 고독과 불안과 허무 앞에서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 그러나 존재의 이유를 자각하는 존재였다.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문학예술(1956), 신경림(申庚林): 1936 ~ >


재(存在)라는 게 뭔가? 한자 존(存)은 풀의 싹이 땅거죽을 뚫고 나오는 모양의 재(才)의 변형 속에 어린아이 자(子)가 들어 있는 형상으로서 어린 아이가 자기만의 방식을 터득해나간다는 함의가 읽혀진다. 또 재(在)는 재(才)의 변형 속에 흙 토(土)가 들어 있는 형상으로서 흙 즉 이 세상의 방식을 터득하여 살아남는다는 함의가 읽혀진다. 

실존철학용어를 빌리자면 존(存)은 ‘단독자(單獨者)’이고 재(在)는 셰계 속의 단독자 즉 ‘현존재(現存在)’다. 실존주의 철학의 가이드북처럼 여겨지는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의 저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는 존재와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바 존재 또한 ‘거기(da)’에 ‘있는(sein)’ 즉 현존재(Da-sein)라고 주장했었다. 사물과 달리 의식 활동을 하는 인간은 무엇을 의식하기 위한 존재인 바, 무엇에 의해 의식되는 존재가 아니므로 인간의 존재방식은 사물의 존재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존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고찰하는 유일한 존재다.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객체이지만 세계를 관찰한다는 점에서는 주체, 스스로 존재하면서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여 깨닫는다는 점에서 ‘자각존재(自覺存在)’라고도 불린다. 

신경림 시인
충청북도 중원 출신으로서 감수성이 예민한 스무 살 시절에 <문학예술>에 ‘낮달’ ‘갈대’ ‘석상’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시인 신경림(申庚林)도 현존재로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척이나 고민했었던 것 같다. 그의 데뷔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후 한국사회의 가치관의 혼란과 맞물려 젊은이들 사이에 열병처럼 번지던 실존철학의 영향 탓인지 삶을 직시하여 개인의 고독과 불안과 허무의 뿌리를 파헤치려는 경향이 진하게 묻어난다. 작중의 ‘갈대’는 고독과 불안과 허무 앞에서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 ‘울음’은 흔들림에서 벗어나려는 존재의 몸부림의 결과, ‘바람’이나 ‘달빛’ 등의 외재적 요인이 아니라 자신의 울음으로 인해 존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음에 실존철학자들이 입만 열면 부르짖던 존재의 주체성이 절로 떠올려진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임을 깨닫고 그걸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도 실존주의 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닮았다. 

신경림의 존재의 탐구는 한 동안의 절필(絶筆) 기간을 거쳐 고향의 토속과 농민의 한으로 분출된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농무(農舞, 창작과비평사, 1975년)’, ‘갈대’에선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던’ 신경림이 ‘농무’에선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을 원통하게 여겨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라고 꽹과리를 두드리는 모습에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게 근거 없는 반전(反轉)은 아닌 듯싶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아래서 응어리진 농민의 한과 울분과 고뇌를 폭죽 터뜨리듯 표출한 신경림에게서 실존의 결단과 행동과 책임과 연대성을 강조했던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가 떠올려지는 게 우연은 아닐 거라는 말이다. 사르트르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앙가주망(engagement: 사회참여)’를 부르짖었듯이 신경림 또한 자신의 존재가 처한 세상 즉 박정희 독재하에서 ‘행동하는 시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확인한 후 앙가주망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던 ‘갈대’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게 원통하여 꽹과리를 두들겨대는 농민으로 표변한 게 놀랍기는커녕 이유 있는 귀결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신경림이 우여곡절 끝에 박정희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하고 민주화의 꽃이 만개하자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시집 <낙타(2008년 창비)>의 표제시 ‘낙타’의 일부분)라고 읊으면서 다시 존재의 탐구에로 회귀하는 것도 매우 당연해보이고! 

시라는 것도 시인의 존재 인식에 따라 변하는 것임을 실감한다. 50년대에 속으로 조용히 울던 갈대가 70년대엔 부조리에 저항하여 꽹과리를 울려대다가 나이 80이 넘어서는 세상의 슬픔이나 아픔은 까맣게 잊고 달관과 초월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음에 세계 속에서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존재의 이유를 묻는 현존재의 자각과정을 본보기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인간의 존재라는 게 ‘거기(da)’에 ‘있는(sein)’ 현존재(Da-sein)라는 것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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