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떼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도 모르게
번쩍이는 길이 되어
떠나감 되어.
끝까지 잠 안든 시간을
조금씩 얼굴에 묻혀가지고
빛으로 포효(咆哮)하며
오르는 사랑아.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
<새떼(민학사, 1975), 문정희(文貞姬): 1947~ >
한자 류(流)는 물을 뜻하는 삼수변( 氵=水 )에 아기가 양수를 타고 태어나는 모양의 류(㐬)가 붙어만들어진 글자로 리(理)의 구현(具現)을 표현할 때 많이 쓰인다. 수학과 천문학으로 만물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Thales)는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었고 중국의 노자(老子)는 한술 더 떠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고로 도와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 幾於道)”고 예찬했었다. 흐름을 관찰한다는 것은 이치를 꺠달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렇게 해서 깨달은 이치에 부합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자고이래 많은 시인들이 '흐름'을 주요 소재로 채택했던 것도 이치로 정화한 감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공(時空)의 처음과 끝도 모르는 우리 인간의 삶이야말로 어떤 흐름 속에 던져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류(時流)나 유행(流行)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을 터, 우리의 삶이 어떤 거대한 흐름을 타고 흘러가고 있다는 깨달음은 이제 철학자나 시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장통의 장삼이사도 다 아는 주지의 상식이 되었거니와, 어떤 흐름 속에 던져진 자신의 삶 또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는 불안과 허무를 감지하기도 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자신의 의식은 정체되어 있는 반면 그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는 것을 감지할 때의 충격이 철학을 강요하고 시를 쓰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 Apollinaire)도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e)'에서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고 노래했었다.
문정희 시인 |
전남 보성 출신으로 1969년에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 시인 문정희(文貞姬)는 자신이 어떤 ‘흐름’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흐름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 같다. 1975년 민학사에서 펴낸 시집 ‘새떼’의 표제시 ‘새떼’도 그런 관찰의 결과로 보인다. 하늘 저 편으로 날아가는 새떼의 모습에서 어떤 흐름을 보고, 그 흐름이 새떼라는 일물(一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피’로 대변되는 지상의 생명들이나 ‘가랑잎’ 같은 하찮은 것들까지 동참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과 보편성 즉 어떤 순리(純理)로 확대시키고 있음을 본다.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라는 대목에선 원하든 원하지 아니 하든 흐름이라는 자연(自然)에 순응(順應)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諦念)이 읽혀지기도 한다. 한자 순(順)은 이치의 흐름을 상징하는 내 천(川)에 자신의 생각이나 철학을 상징하는 머리 혈(頁)이 붙은 것으로서 이치의 흐름에 자신의 머리는 처박고 따르는 것이고 또 불가(佛家)에 뿌리가 박혀 있는 말 ‘체념’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끝까지 잠 안든 시간’이나 ‘울 이유’를 뒤로 한 채 하늘로 하늘로 흘러간다는 것이야말로 순응과 체념이 아닌가?!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고 고집했던 아폴리네르와는 정반대다. 흐름 안에서 함께 순응하는 존재와 흐름 밖에 머물면서 그 흐름을 관조하는 존재,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그 두 존재 모두 불안과 허무라는 공통분모 위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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