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6일 금요일

Children of Light - 시대의 반항아 눈으로 본 ‘어둠의 자식들’

13개의 붉고 흰 줄이 번갈아 가로로 그어진 바탕 왼쪽 위편 사각형 안에 50개의 흰 색 별이 담겨 있는 성조기. 미국 독립 초기에는 12개 주를 상징하는 12개의 별들이 원을 이루고 있었으나 새로운 주들이 연방에 추가되면서 별들의 숫자가 늘었고 1960년 하와이주가 병합되면서 50개가 됐다. 와스프의 후손 로웰은 그런 성조기의 역사와 의미를 자랑스럽게만 받아들이진 않았던 것 같다.

Children of Light (빛의 자식들)



Our fathers wrung their bread from stocks and stones
우리 아버지들은 가축과 돌을 쥐어짜 빵을 만들어냈다네
And fenced their gardens with the Redmen's bones;
그리고 피부색 빨간 놈들(인디언들)의 뼈다귀로 정원 울타리를 쳤지;
Embarking from the Nether Land of Holland,
홀란드의 밑바닥 땅에서 출항한,
Pilgrims unhouseled by Geneva's night,
순례자들은 제네바의 밤에 의해 집을 잃었고,
They planted here the Serpent's seeds of light;
여기에다 빛의 독사의 씨앗들을 뿌렸지;
And here the pivoting searchlights probe to shock
그리고 여기 빙빙 돌아가는 서치라이트가 충격꺼리를 탐사하네
The riotous glass houses built on rock,
시끌벅적한 유리 집들이 바위 위에 지어지고
And candles gutter by an empty altar,
공허한 제단에선 촛농이 녹아 흐르는데
And light is where the landless blood of Cain
적실 땅 없는 카인의 피에 비쳐지는 빛
Is burning, burning the unburied grain.
아직 파묻지 않은 곡식을 태우고 또 태우네

                                       <로버트 로웰 주니어(Robert Lowell Jr.); 1917년~1977년>

 
국은 다인종 사회이지만 아직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백인이면서도 앵글로 색슨 언어 즉 영어가 모국어이고 신교도인 그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자신들의 조상이 미국을 개척한 이래 그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는 긍지로 똘똘 뭉쳐 그들이야말로 미국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여긴다. 그걸 비웃을 수는 없다. 미국 개척 초기 하버드와 예일 등 소위 아이비리그(Ivy League)의 대부분이 그들에 의해 설립됐고, 미국 독립을 쟁취한 이후 눈부신 성장도 와스프들에 의해 주도됐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 바, 와스프의 숫자가 미국 전체 인구의 25% 미만으로 쪼그라들고 신교도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한 지금까지도 유형무형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인류학적으로 ‘앵글로 색슨’은 5세기 이후 영국에 정착한 게르만족 후예를 가리키지만 미국서는 독일과 프랑스는 물론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백인들까지 포함하여 두루뭉수리 지칭하므로, 미국의 와스프로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앵글로 색슨계가 아니다. 실제로 밴더빌트(Vanderbilt)와 루스벨트(Roosevelt) 가문은 네덜란드계, 록펠러(Rockefeller)와 에스터(Astor) 가문은 독일계, 듀폰(Du Pont) 가문은 프랑스계, 멜론(Mellon) 가문은 스코트아일랜드계다. 그래서 요즘은 와스프가 백인 상류계급의 특권의식과 위선을 비꼬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젊었을 적의 로버트 로웰 주니어.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민낯을 까발린 반항아였다.
와스프 가운데서도 보스턴 출신 엘리트들의 자부심은 유별나다. 이른 바 ‘보스턴 브라민(Boston Brahmin)’이다. ‘브라민’은 본디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학자계급을 일컫던 말이었으나, 미국서는 신대륙 개척 초기 플리머스(Plymouth)와 매사추세츠만(Massachusetts Bay)에 정착한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의 후예로서 하버드를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발전시킨 보스턴 엘리트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던 바, 그 지역 상류층 백인들의 억양을 ‘보스턴 브라민 액센트(The Boston Brahmin accent)’라고도 한다. 그들은 매우 신중하고 검소한 생활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학문이나 예술에 대한 열정은 뜨거워 오늘날의 뉴잉글랜드 백인 상류사회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뉴잉글랜드 부자 타운의 부인들이 명품 핸드백 대신 친환경적인 헝겊가방을 들고 다니고 연봉이 수백만달러나 되는 변호사와 의사들이 상표도 없는 카키 반바지에 헝겊 운동화를 신고 동네 공원에서 열리는 시낭송회에 참석하는 것도 그런 보스턴 브라민의 전통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러나 겉으로는 검소하고 예의 바르고 신중하지만 속이 특권의식과 위선으로 꽉 차 있는 사람들도 많아 미국의 다인종 사회에 융화되지 않는 계층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1917년 보스턴 브라민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시인이 된 후 보스턴 브라민의 특권의식과 위선을 까발린 로버트 로웰 주니어(Robert Lowell Jr.; 1917년~1977년)는 말 그대로 보스턴 브라민의 이단아다. 19세기 유명 시인 제임스 러셀 로웰과 하버드 총장 애버트 로렌스 로웰 등을 배출한 로웰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특권의식을 내팽개친 채 가톨릭으로 개종했는가 하면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양심적 병역기피자로서 1년 1일의 형을 선고받고 5개월 동안 코네티컷 주 댄버리 연방 교도소에서 복역하기도 했고, 보스턴 브라민의 특권의식과 위선을 비판하는 시를 써서 필명을 날렸다. 그가 1946년에 발표한 ‘빛의 아이들(Children of Light)’ 또한 필그림 파더스들의 위선을 까발린 시다. 필그림 파더스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을 것을 지적하여 “인디언들의 뼈다귀로 밭 울타리를 쳤다(And fenced their gardens with the Redmen's bones)”고 비웃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조상들을 여호와가 자신이 제물로 바친 농산물 대신 동생 아벨(Abel)이 제물로 바친 살찐 어린 양을 거두자 시기하여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인 카인(Cain)에 비유하고 있음을 본다. 신의 뜻과 가르침에 따라 살겠다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인디언들을 죽이고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야말로 위선 중의 위선이라는 것이다. 그런 필그림 파더스야말로 ‘빛의 자식들’이 아니라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게 로웰의 고백적(?) 반성이었다.

‘보스턴 브라민’ 출신이 보스턴 브라민의 위선을 까발리는 시를 썼다는 자체가 아이러니컬하기는 하지만 로웰의 시작(詩作)을 그런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격, 로웰이 자기 고백시(confessional poetry)를 통해 전통을 가장한 위선적인 권위와 허위로 치장한 미국 역사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까먹어서는 아니 된다. 1947년과 1974년 두 차례나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또 1977년 내셔널 북 비평가상을 수상한 데 이어 많은 평론가들이 ‘전후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들 중의 하나로 꼽는 것도 로웰이 고백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고 그걸로 시대를 비판한 공로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제자인 앤 섹스턴(Anne Sexton)과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는 그와 함께 미국 고백시파의 주류를 이룬다.

로웰은 시대의 반항아였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이 말해주듯 로웰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성격이 까다로웠고, 반전운동과 시민권 옹호 운동에 앞장 서는 등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우울증으로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런 반항아였기에 모든 것을 내팽개친 채 시대를 비판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그를 감싸주고 추켜 세워주는 미국사회의 포용력 또한 놀랍기만 하다. 그 포용력이 미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보스턴 브라민의 미덕 가운데 하나여서 아이러니컬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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