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1일 토요일

To be, or not to be - 고뇌 속 캐릭터의 하마르티아(hamartia)

1948년 개봉된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 주연의 영화 '햄릿'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영화상과 최우수 남우주연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했다.


To be, or not to be(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게 문제야: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마음속으로 참고 견디는 게 더 고결할까?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그 잔인무도한 운명의 돌팔매질과 화살들을,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 맞서 무기를 들고
And by opposing end them: to die, to sleep 
대항하여 끝장을 내나: 죽는다는 건 잠드는 것
No more; and by a sleep, to say we end 
그 뿐이야; 그래서 잠자면 끝이라고들 말하잖아
The Heart-ache, and the thousand Natural shocks 
그 가슴 아픈, 그 천개의 당연한 충격들은
That Flesh is heir to? 'Tis a consummation 
몸뚱이가 물려받나? 그것도 마무리 짓는 방법 중의 하나일 테지
Devoutly to be wished. To die to sleep, 
경건하게 바래봄직도 해. 죽어 잠드는 것 말이야,
To sleep, perchance to Dream; Aye, there's the rub, 
자는 것, 아마도 꿈꾸는 것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까칠할 거야
For in that sleep of death, what dreams may come, 
그런 죽음의 잠 속에선 어떤 꿈들을 꾸게 될지 모르니까
When we have shuffled off this mortal coil, 
(그래서) 이 속세의 괴로움을 벗어던질 땐
Must give us pause. There's the respect 
꼭 멈칫 하게 된단 말이야. 그런 면이 있어
That makes Calamity of so long life: 
그래서 불행에도 불구하고 오래 오래 살게 되는 거지:
For who would bear the Whips and Scorns of time, 
안 그러면 누가 세월의 채찍과 경멸을 참고 견디겠나?
The Oppressor's wrong, the proud man's Contumely, 
짓밟는 자의 오류, 잘난 척하는 사람의 오만무례,
The pangs of disprized Love, the Law’s delay, 
보상받지 못한 사랑의 고통들, 질질 끄는 정의(법) 
The insolence of Office, and the Spurns 
관리들의 시건방짐, 그리고 그 코방귀들
That patient merit of the unworthy takes, 
그 가치 없는 것들을 참아내는 게 미덕일진대
When he himself might his Quietus make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 끝장낸다면
With a bare Bodkin? Who would Fardels bear, 
뾰족한 송곳으로? 누가 불행의 등짐을 지고
To grunt and sweat under a weary life, 
진저리쳐지는 인생 투덜거리면서 땀을 흘리겠나
But that the dread of something after death, 
그런데 말이야 죽은 다음에 뭐가 있는지 두렵기는 하지
The undiscovered Country, from whose bourn 
그 미지의 나라, 거기에 가면
No Traveller returns, Puzzles the will,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 어떤지 헷갈려
And makes us rather bear those ills we have, 
그 점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고통과 불행을 참게 만들지 
Than fly to others that we know not of. 
우리가 모르는 저 세상으로 도피하기보다는.
Thus Conscience does make Cowards of us all, 
이런 식의 깨달음(생각)이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 거야
And thus the Native hue of Resolution 
그래서 결단의 본래의 색조가 
Is sicklied o'er, with the pale cast of Thought, 
구역질나게 변하는 거야, 생각의 창백한 투사(投射)로 말이야
And enterprises of great pith and moment, 
그래서 한 순간의 중대한 모험은
With this regard their Currents turn awry, 
이런 식으로 다 길이 빗나가서
And lose the name of Action. Soft you now, 
행위의 명분을 잃게 되지, 유약해진단 말이야
The fair Ophelia? Nymph, in thy Orisons 
그 고운 오필리어? 요정이여, 그대의 기도 속에서
Be all my sins remembered. 
나의 죄악들을 모두 기억하게 되리라 

         <‘햄릿(Hamlet)’ 3막1장 독백,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 1616년)>


즘은 ‘캐릭터(character)’라는 말을 문학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마스코트와 같이 상징성을 목적으로 한 대상이나 등장인물을 상품화한 제품까지 포함하는 등 포괄적으로 사용하지만 원래는 사람이나 사물의 특질을 뜻하는 말이었다. ‘character’라는 말의 뿌리 또한 ‘긁은 것’ ‘새긴 것’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kharaktêr’로서 어떤 표시를 하여 다른 것과 구별한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게 ‘특정 개인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질’ 즉 ‘성격’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됐고, 특히 소설이나 연극 등 예술 작품 속 등장인물의 가리키게 됐던 바,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명저 <시학(Poetics)>에서 ‘캐릭터’를 비극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여섯 가지 요소 중의 하나로 꼽았고, 영국 작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Edward Morgan Forster)는 <소설의 양상(Aspects of the novel)>에서 소설 속 캐릭터들의 유형을 ‘평면적 캐릭터(flat character)’와 ‘입체적 캐릭터(round character)’로 나눴다. ‘평면적 캐릭터’는 변화 없는 고정적 이미지로 줄거리 전개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반해 ‘입체적 캐릭터’는 복잡한 양상의 변화를 보이면서 줄거리의 전개와 발전을 주도해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들은 “소설이나 연극의 성공여부는 새로운 캐릭터 창출에 달려 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왼쪽)과  1605년 출간된 '햄릿' 의 표지.
문학작품 속의 캐릭터가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데에는 19세기 러시아 작가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의 공이 크다. 투르게네프는 1860년 불우 문학인들과 학자들을 돕기 위한 한 모임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문학 작품 속의 대표적인 캐릭터를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나누고, 풍차를 악랄한 거인으로 착각한 나머지 돌진했던 돈키호테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겸허한 마음과 위대한 영혼을 지닌 용감한 캐릭터로 추켜세운 반면, 에고이즘에 찌든 회의론자로서 언제나 머릿속이 자기 자신의 문제로 가득 차 있는 햄릿은 끊임없이 자신을 힐책하지만 아무 결론도 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캐릭터라고 깎아내렸었다. 1852년 당시 러시아 사회의 가장 큰 문제였던 농노 제도를 공격한 소설 <사냥꾼의 일기(The Hunting Sketches)>를 발표할 정도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투르게네프였기에 햄릿보다는 돈키호테에 더 우호적(?)이었겠지만, 이후 투르게네프의 호불호(好不好)와는 관계없이 인간 성격의 유형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나누는 게 유행했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햄릿형이냐? 돈키호테형이냐? 영국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이 발표되고 스페인에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돈 키호테(Don Quixote de La Mancha)>가 출판된 것은 모두 17세기 초, 자연과학이 등장하고 철학적으로는 합리주의가 꽃을 피워 계몽주의의 기반이 다져지던 당시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에 대한 탐구가 활발했던 바, 문학작품 속에서 지극히 대조적인 두 캐릭터가 창출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후 문화예술사는 햄릿형이 쓰고 정치사회사는 돈키호테형이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1599년에서 1601년 사이에 12세기 덴마크 왕가를 배경으로 쓴 것이지만 주인공 햄릿은 오늘날에도 수두룩하다. 작품 속 햄릿이 겪었던 불안과 고뇌와 자학이 오늘날 현대인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고뇌와 자학과 매우 유사하여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캐릭터로 자리 잡게 됐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햄릿>에 나오는 7개의 독백 중 4번째인 3막1장의 ‘To be, or not to be’를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려니와, 그 제각각의 해석이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지니는 것도 ‘햄릿’이라는 입체적 캐릭터가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인간형을 표현하는 데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캐릭터 ‘햄릿’이 사회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처음엔 문맥을 감안하여 ‘사느냐, 죽느냐’로 해석되던 게 철학적 터치가 가미되어 ‘존재하느냐, 마느냐’로 확대됐다가 요즘엔 경제논리(?)까지 덧붙여졌는지 ‘소유냐, 아니냐’로까지 비약하고 있음을 본다. 독백(獨白, soliloquy)의 의미 그대로라면 ‘혼잣말’이건만 그 ‘혼잣말’이 숱한 사람들과의 ‘대화’로 변해버렸음에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재차 실감한다. 

‘To be, or not to be’를 어떻게 해석할 지는 읽는 사람의 자유와 취향이겠지만, 해석이 제아무리 큰 타당성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원전의 텍스트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바, ‘사느냐, 죽느냐’로 해석하는 게 가장 무난할 듯싶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중의성(重義性, ambiguity)을 극대화하기 위해 ‘die’ 대신 존재를 부각하는 ‘be’를 사용한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이지만, 제4독백 전체의 내용이 죽음에 관한 것이고 보면, ‘사느냐, 죽느냐’가 더 원전에 충실할 거라는 말이다. 실제로 첫 행의 ‘be’는 다섯 번째 행에서 ‘die’로 구체화되었거니와, 또 ‘die’를 ‘sleep’에 비유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죽음을 결행하느냐, 마느냐’ 사이에서 고뇌와 우유부단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본다. 

고뇌 속에서의 우유부단! 셰익스피어는 제4독백을 통해 햄릿의 ‘비극적 결함(hamartia, tragic flaw)’을 독자나 관객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다는 것을 까먹어서는 아니 된다. ‘잘못을 저지르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hamartanein’에서 나온 ‘하마르티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차용한 것으로서, 그에 따르면 비극의 주인공은 높은 지위와 고귀한 품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하마르티아’로 인해 불행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 바, ‘하마르티아’야말로 비극을 비극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대로라면 ‘햄릿’의 하마르티아는 ‘고뇌 속의 우유부단’일 것이며, 그게 현대인의 행태와도 일치하는 바, 현대인들이 ‘돈키호테형’보다는 ‘햄릿형’으로 변해가기에 고독과 불행의 등짐을 벗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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