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겨울에 거닐었던 보스턴 캠브릿지와 알스턴 사이의 강변 설경. 사는 게 삭막하다고 여겨질수록 설국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는 것 같다. |
설야(雪夜)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1938년 1월 조선일보에 발표, 시집 ‘와사등(1939)’에 수록, 김광균(金光均): 1914년 1월 19일~1993년 11월 23일>
말 그대로 지구온난화 탓인지 겨울이 겨울 같지 않다. 지난해는 물론 올해 들어서도 쌀가루 같은 눈들만 오는 둥 마는 둥, 눈다운 눈 한번 내리지 않았다. 마지막 잎까지 떨군 채 맨몸으로 겨울바람을 맞고 서 있는 가로수들 보기가 민망하다. 하늘은 잿빛, 멀리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소음은 따분한 단조, 약간 삐딱하게 서 있는 길모퉁이 우선멈춤 표지판에서는 따분한 체념마저 읽혀진다.
참 삭막하다. 이런 때면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꿈꾸던 ‘설국(雪國)’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싶다. 가끔 서양 무용에 관한 글을 번역하는 일 말고는 별다른 일을 하는 것이 없는 고독한 주인공 시마무라(島村)으로 변장하여, 설향(雪鄕)의 온천으로 가서, 눈 내리는 밤 조용한 여관방에서, 순결한 생명력을 가진 게이샤 코마코(駒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락사락 내리는 눈, 창호지마다 영롱한 달빛, 코마코의 청순미, 화톳불 온기만큼이나 따뜻한 정(情)으로 그녀를 유혹하리라. 조금은 위선의 껍데기를 뒤집어써야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이 세상의 심성 여린 사람들은 다 안다....그래 맞아, 세상은 더럽고 치사하지만 당신과 나는 지금 순수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당신의 눈 속에 하얀 눈이 내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우리 먹고사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먹고 살기 힘든 이민사회에서 아줌마들 주급 떼먹는 봉제공장 사장이나 당신을 등쳐먹은 선배 이야기는 입에 올려봤자 비싼 밥 먹고 충전해놓은 에너지 낭비다, 지금 이 순간, 당신과 나만이 깨어 있는 이 정적 속에서 감미로운 키스를 나누자, 당신과 나의 영혼이 신이 나서 저 허공중의 눈송이들처럼 너울너울 춤출 때까지 우리 입맞춤을 하자, 그런 달콤한 말들로 코마코를 꼬드길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여자로 만들어 희열(喜悅)에 들뜨게 하리라.
그러나 작가 야스나리는 시쳇말로 ‘변태(變態)’였던 것 같다. 소설이라는 게 작가 마음대로 풀어나가는 것이긴 하지만 착하고 마음 여린 남자 시마무라를 깊고 깊은 애수의 심연(深淵)으로 몰아넣는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코마코의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시마무라의 육체를 얼어붙게 하면서 겨우 정신적인 쾌락만을 허락했다. 그러면서 거기에다 변명을 달았다. 순수한 남녀 사이에는 교접(交接) 이상의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다는 것이었다. 눈 내리는데,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여자, 그녀와 단둘이 밤을 지새우면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고 싶지만, 육체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녀의 속절없는 애정은 더욱 더 청순미를 더한다, 흰 눈은 사락사락 내리는데....변태 치고는 꽤나 멋진 변태다. 야스나리는 이 작품으로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39년에 펴낸 시집 '와사등'(사진 왼쪽)과 만년의 김광균 |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서 이미 13세 때인 1926년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시인 김광균(金光均)도 카와바타 야스나리 못지않은 ‘변태’였던 것 같다. 1930년대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으로 가담하여 소위 모더니즘 시 운동에 앞장선 그는 “시는 하나의 회화”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시각적인 시를 계속 발표했다. 그림을 그리듯이 시를 썼다고나 할까, 감각적 이미지 포착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중고교 교과서 실릴 정도로 잘 알려진 작품 ‘추일 서정(秋日抒情)’에서는 낙엽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에 비유했었고 ‘와사등(瓦斯燈)’에선 황혼의 고층빌딩을 보며 ‘창백한 묘비’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 재주가 비상했기에 눈 내리는 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잃어진 추억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며 슬픔에 젖는 애상(哀傷)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깊은 밤 뜰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듣는 놀라운 감성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육체적 섹스보다는 정신적 섹스의 기쁨과 쾌감이 더 크다고 믿었던 카와바타 야스나리도 고개를 끄덕여줄 듯싶다.
하얀 눈이 한번만이라도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는데, 모든 것 다 잊고 눈 속에 파묻혀보고 싶은데....올려다보지도 말라는 듯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을 오기로 올려다보며, 만만한 담배연기나 길게 내뿜으면서, 기설제(祈雪祭)를 지내본다. 하긴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한국 전쟁 중 납북된 동생이 운영하던 건설상회를 얼렁뚱땅 맡아 중견 기업으로 키워내는 등 후대엔 시인의 길을 접고 기업가로 활동했던 김광균 역시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까지는 세상 삭막하고 마음 울적할 때마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리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잠시도 버틸 수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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