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4일 토요일

그대의 말속을 걸으며 - 불립문자(不立文字) 그늘의 고독

롱아일랜드 시티 퀸즈보로브릿지 옆길을 한 젊은 여자가 겨울 찬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통이 되지 않아서 외로운 세상, 저 여자는 어떤 말 속을 걷고 있을까.

그대의 말속을 걸으며


그대가 지상에 뿌려 놓았던 그 숱한 말(語)들 속을
나는 걷는다. 그러면 별들은 저마다 가볍게
부서지고 그대가 지상에 뿌려 놓은 그 숱한
말들 하나하나에 나는 대답한다. 그러면 또
나는 후회하는 일로 가득히 허물어지고 분명
그대의 말과 뒤늦게 대답하는 나의 말들이 결국은 내가
그대 없이 거니는 거리의 어느 곳에서도
만나지 못할 때,
나는 비로소 후회하지 않기 위한 후회를 위해
다시 처음부터 세상을 걸어야 함을 깨닫는다.
아아, 세상의 모든 그대들이여 그대 단 한번도
사랑의 날들 속에서 울어 보지 않았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들을 이별이
지난 뒤의 시간 속에서 내내 울어야 한다.

                                                   <박남원; 1960년- >


리말 속담에 ‘담벼락하고 말한다’는 게 있다. 사고가 꽉 막힌 채 남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 대화할 때의 답답함을 표현한 것이지만 태생적으로 뭐든지 자기 머리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는 ‘담벼락’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답시고 하는 말 자체의 의미가 부정확할 때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아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크다, 작다, 아름답다, 밉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표현 또한 그 기준이 사람에 따라 애매하여 정확하게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말로써 오해를 풀려다 오해가 더 커지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겠다. 

말이라는 것은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한 수단일 뿐, 말 그 자체보다도 그 말로써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communication’의 어원 또한 그 점을 잘 말해준다. ‘communication’의 뿌리는 ‘공유하다’ ‘공감하다’ 등을 뜻하는 라틴어 ‘communicare’로서, 말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공유한다는 의미다. 불교의 한 분파인 선종(禪宗)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흔히 ‘불립문자’를 ‘말이 필요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천만의 말씀,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는 의미의 ‘불립문자’ 자체도 문자라는 것을 까먹으면 ‘불립문자’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불립문자’는 무슨 심오한 철학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것, 즉 말보다는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라는 충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부처의 설법을 담은 능가경(楞伽經)에서도 “문자에 따라 의미를 해석하지 말라[不立文字]. 손가락으로 뭔가 가리키자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을 보지 않고 오로지 손가락 끝만 응시하는 것과 같다[見指忘月]”고 자세히 풀이하고 있음을 본다. 

사랑의 표현도 커뮤니케이션의 일종, 사랑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뇌와 번민의 상당부분 또한 주고받는 말의 이해와 오해 사이의 간격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랑해본 사람들은 다 잘 안다.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뭔가?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의 사랑과 네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의 사랑은 과연 동일한 건가? ‘사랑한다’는 말 즉 언어적 커뮤니케이션과 상대방을 사랑할 때 드러내 보이는 표정이나 몸짓 등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Meta-communication)이 차이를 보일 때는 어느 쪽을 신뢰해야 하나? 어찌 사랑뿐이랴. 타인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나 불통처럼 답답하고 슬픈 것도 없다는 데는 ‘불통’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손가락질을 받다가 결국엔 국회에서 탄핵 당한 박근혜 대통령 빼놓고는 대한민국의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 

박남원 시인
전북 남원 출신의 시인 박남원(1960년- )의 ‘그대의 말속을 걸으며’를 읽노라면 말 한마디, 몸짓 하나, 얼굴표정 하나에 기쁨과 슬픔 사이를 오가는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을 통해 등단하여 세상으로부터 ‘민중시인’이라는 딱지를 선물받은 박남원이 그런 시를 쓴 것도 다소 의외(?)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소재로 소통과 불통 사이의 회한과 슬픔을 진솔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음에, 세상의 편견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재차 실감한다. 작중의 ‘나’는 세상과 소통하려고 ‘그대가 지상에 뿌려 놓은 그 숱한/ 말들 하나하나에’ 대답하지만 ‘그대의 말과 뒤늦게 대답하는 나의 말들이 결국은 내가/ 그대 없이 거니는 거리의 어느 곳에서도/ 만나지 못할 때’ 다시 처음부터 세상을 걸어야 한다는 막막함에서는 이 시대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소외감이 뚜렷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런 하소연의 시를 쓰는 박남원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은 박근혜 정부 사람들의 ‘문화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물어보나 마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박남원의 시를 단 한 편이라도 제대로 읽어봤는지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한국작가회의(민족문학작가회의의 후신) 회원으로 이름을 올려놓고는 있지만 문단 돌아가는 꼴이 꼴같잖아서 발을 뺀 지 오래됐다는 박남원,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소통이 되지 않아서 외로운 세상, 박남원은 사회적 강자와 약자 사이의 갈등과 불통을 그렇게 비판했는지 모르겠지만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시인이 쓴 시 치고는 너무 부드럽다. 지금도 어디선가 허물어져 내내 울고 있을 박남원의 시어(詩語)들 사이를 걷고 또 걸어본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