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7일 토요일

추일 서정(秋日抒情)-시인의 눈으로 본 색(色)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의 토룬 시가지 풍경을 담은 우편엽서. 코페르니쿠스 생가 등 중세 유적이 잘 보존돼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추일 서정(秋日抒情)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1940.7, 인문평론, 김광균(金光均): 1914년 1월 19일~1993년 11월 23일> 


자 눈 목(目)은 눈의 생김새를 본뜬 것, 눈을 뜨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이든 아니든 뭔가가 보인다. 그걸 '견(見)'이라고 했다. 그 '견'을 좀 더 자세히 구분하기 위해 보고자 하는 것을 보는 것을 볼 시(視)라고 했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나타날 현(現)이라고 했다. 시(視)는 신의 강림이나 뭔가를 희구하여 제사를 지낼 때의 제단을 본뜬 시(示)와 볼 견(見)이 합쳐진 것이고 현(現)은 빛을 발하는 구슬 옥(玉)과 볼 견(見)이 합쳐진 것, 시(視)의 주체는 뭔가 보고자 하는 아(我)이고 현(現)의 주체는 나의 눈에 보이는 비아(非我), 영어로 말하자면 시(視)는 'see'이고 현(現)은 'appear'다. 'see'의 뿌리는 'to see, look, behold; observe, perceive' 등의 의미를 지닌 고대영어 'seon'이고 'seon'의뿌리는 'to follow'의 의미를 지닌 인도 유럽어의 접두사 'sekw- '로서 나의 눈이 나의 의지대로 뭔가를 따라가면서(to follow) 보는 것을 말하는 반면 'appear'의 뿌리는 '앞으로 나오다'(to come forth)라는 의미의 라틴어 'apparere'로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뭔가를 볼 때 눈으로 보는 건가? 자신의 뇌에 이미 입력돼 있는 정보로 해석하는 건가? 각막을 통해 들어온 빛은 수정체에서 굴절돼 유리체를 통과해서 망막에 상이 맺히고 시신경을 통해 대뇌피질(大腦皮質)의 후두엽(後頭葉)에 전달된다. 후두엽에는 시각연합영역과 일차시각피질이라고 하는 시각중추가 있어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바,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각피질에 도착하면 사물 모양 등을 분석한 후, 그 결과를 이미 뇌에 입력돼 있는 정보 즉 개개인의 지식과 경험 등으로 해석한다. 여기에 장애가 생기면 눈의 다른 부위에 이상이 없더라도 볼 수 없게 되고 후두엽에서 발작이 일어나면 환시(幻視, Visual hallucication)가 유발되기도 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지만 그 일견(一見)이 개개인의 뇌에 입력돼 있는 정보에 따라 제각각으로 해석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우스개 속담이 생겨난 것도 그와 무관치 않거니와,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영어 속담도 뭔가를 본다는 것은 본 것에 대한 뇌의 해석에 지나지 않고 그게 믿음으로 굳어진다는 의미로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런 믿음 즉 주관적인 관찰(觀察)에 의해 얻어진 개념을 ‘관념(觀念)’이라고 한다. 한자 볼 관(觀)은 황새 관(雚)에 볼 견(見)이 붙어 만들어진 것이고 생각 념(念)은 이제 금(今)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것으로서 지금 머릿속에 떠올려진 생각을 말한다. 

1936년 창간된 문예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거점으로 삼아 “시는 하나의 회화”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시각적인 시들를 발표했다는 시인 김광균(金光均: 1914년 1월 19일~1993년 11월 23일)은 꽤나 관념적이었던 것 같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 게 아니라 관념과 상상력의 안경을 통해 봤다. 그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로 꼽히는 '추일서정(秋日抒情)' 또한 그 점을 잘 말해준다. '낙엽'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후 소련의 점령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이 멸망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을 떠돌아야 했던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에 비유한 것은 쓸쓸한 가을날 길 위에 나뒹구는 낙엽의 이미지를 그려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덮어줄 수 있지만, 그걸 보고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떠올린 것은 김광균 혼자만의 상상이어서 실소가 머금어진다. '도룬'은 폴란드 중부에 위치한 도시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의 일본어 발음을 한글로 옮긴 것으로서,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큰 공습이나 포격을 당하지 않아 르네상스 시기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생가 등 중세유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된 도시들 중의 하나, 1939년 9월 큰 저항없이 토룬을 점령한 나치 독일은 그곳이 한 때 프러시아의 영토였던 점을 들어 독일 영토로 병합한 후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과 폴란드인들을 대거 추방하거나 학살하고는 포로수용소로 사용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룬에서 독일군과 폴란드군과의 공방이 치열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흰 이빨을 드러낸 공장의 지붕'과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을 등장시켜 자신이 의도하는 황량한 그림을 그리고 있음에 이 시를 발표할 당시 26세 일본 식민지 청년의 뇌속에 입력된 정보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이 시를 읽은 독자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룬'이라는 도시를 알고 있었는지도 의문, '추일서정'이라는 제목이 없었더라면 이 시의 내용을 개인의 주관적 서정이 아닌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였을 터, 가공의 소재로 그럴싸한 그림을 그린 김광균의 환시에 속아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추일서정'이 실려 있는  김광균의 
두번째 시집 '기항지'(1947년, 정음사)
기실 김광균 작품세계의 진짜 매력은 '환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감성으로 머릿속에 그린 혼자만의 그림을 이미지의 조합으로 그대로 재현하는 재주가 탁월하여. “회화적 이미지에 도회적 감각과 낭만적 서정성을 가미한 독특한 시풍”을 구축했다는 평가에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김광균의 시작(詩作)에 주지주의니 모더니즘(Modernism)이니 하는 칭찬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데 대해서까지는 동의할 수가 없다. 흔히 김광균에 대해 “T.E.흄, E.파운드, T.S.엘리어트 등 영미 이미지즘 시운동을 도입 소개한 김기림(金起林)의 이론과 시작에 영향을 받아 주지적 모더니즘의 시론을 실천했다”고 주장하지만 꼼꼼이 살펴보면 결이 확실히 다르다. 현대 문명에 비판적이고 이미지를 선호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흄이나 파운드 등이 자신의 의지나 감정보다는 지성과 객관을 중시하여 '정서(sentiment)'를 배제한 채 순간의 이미지 포착에 주력했던 반면 김광균은 자신의 정서를 여과없이 드러내 큰 차이를 보이거니와, 영미 시단의 이미지스트들이 사물의 '현(現)'을 그대로 그려냈다면 김광균은 사물을 '시(視)'하여 자신의 뇌에 입력된 정보로 해석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김광균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리움, 비애 등의 감상과 연결된 현란한 수식어들이다. 이러한 수식어들이 만드는 시각적 이미지들은 결국 산뜻한 눈요기로서의 풍경만을 연출할 뿐, 내면의 구체적 경험과 연결된 감동의 세계에 연결되지는 못한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눈으로 보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은 다르다. 이 사람이 본 것과 저 사람이 본 것도 다르다. 불교 용어를 빌리자면 눈을 통해 들어는 모든 것은 색(色), 그 색은 개개인의 뇌 속에 입력된 정보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바, 그 변화의 공통분모를 찾아내 공감을 유도하는 게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걸 얼마나 크게 찾아내는가에 따라 많이 읽혀지고 덜 읽혀진다는 것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 고교 시절 국어시간에 읽던 '추일서정'과 세상살이 어느 정도 경험한 지금 다시 읽어보는 '추일서정'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그게 색이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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