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저물어가는 세월의 강물에 올 한 해를 일군 삽을 씻으면서 순응을 연습해본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 창작과비평사, 정희성(鄭喜成); 1945년- >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어디 저물어가는 게 올 한 해뿐이랴. 세상도 저물어왔고, 나도 저물어왔고,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도 저물어왔으리라. 그게 피부로 느껴진다. 매해 연말, 1년 중 특정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소회와 어줍잖은 감상들에 지나지 않건만 왜 이다지도 새롭게 느껴지는 건가? 그런 것들을 겪을 만큼 겪어 이제는 이력이 생겼다는 듯이 담담하게 다독거리는 것을 순응(順應)이라고 했던가?
한자 순(順)은 내 천(川)에 머리 혈(頁)이 붙어서 된 것으로서, 머리를 흐르는 물에 처박는 모양을 연상케 한다. 혹자는 “흐르는 물과도 같은 성현의 도리에 머리를 숙이고 따르다”라고 해석하지만 천만의 말씀, 윗사람 말을 잘 듣는 것을 ‘순(順)하다’라고 표현하면서 갑순이 미순이 호순이에게 ‘순(順)’자를 붙인 사람들의 축소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노자(老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흐르는 물’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성현의 도리’보다 훨씬 더 위에 위치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자연의 이치에 따르다’라는 의미의 순리(順理)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고, 순리에 적응하여 익숙해지는 것을 ‘순응(順應)’이라고 했다.
흔히 ‘순응’과 ‘적응(適應)’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말맛이 약간 다르다. 갈 적(適)은 ‘누그러지다’라는 의미의 밑둥 적(啇)에 쉬엄쉬엄 걸을 착(辶)이 붙은 것으로서 길을 가다가 지치면 쉬엄쉬엄 간다는 의미, 또 응할 응(應)은 기러기 안(雁)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것이고, 북반부에서 겨울에 남쪽으로 이동하고 봄이면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는 철새 기러기는 무리 짓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바, 응(應)은 환경의 변화나 무리를 좇는 것을 말한다. ‘순응’이 변함없이 항상 옳은 자연의 이치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적응’은 자신의 호오(好惡)와는 관계없이 외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익숙해지려고 애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어로 말하자면 ‘순응’은 ‘adaptation’이고 ‘적응’은 ‘assimilation’이다. ‘adaptation’의 뿌리는 ‘적합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daptare’이고 ‘assimilation’은 ‘닮다’ ‘비슷하게 만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ssimulare’다. ‘순응’이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이라면 ‘적응’은 싫든 좋든 어찌할 수 없어서 따르는 것이라는 냄새를 풍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사회의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 사회 변화의 주체 또한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인간과 사회는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가지는 ‘프랙탈(fractal)’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fractal’은 폴란드 태생의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Benoit Mandelbrot)가 창안한 개념, 어원은 ‘조각 난’ ‘부분으로 부서진’을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fractus’로서, 자연물이나 수학적 분석 등에서 나타나는 규칙이나 질서를 말한다. 그 ‘프랙탈’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파악해보면 인간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변화하고, 그렇게 변화한 인간이 모여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한 사회에 인간은 또 다시 순응 또는 적응하는 바, 그 과정에서의 어느 정도의 부작용과 갈등은 불가피한 덤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다수 또는 힘 있는 세력이 사회변화를 초래할 경우 그런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순응’할 것인지, ‘적응’할 것인지, 또는 거부할 것인지를 놓고 고뇌하는 것을 본다.
창작과비평사에서 1978년에 간행한
정희성 두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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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순응할 건가? 적응할 건가? 그게 문제다. 경상남도 창원 출신 시인 정희성(鄭喜成, 1945년- ) 또한 ‘순응’과 ‘적응’과 ‘거부’ 사이에서 무척 방황했던 듯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순응이 여의치 않자 적응이나마 하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제16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내는 등 한국사회의 소수의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을 주로 발표했던 그의 시작(詩作)에 대해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소위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프랙탈’의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군부독재 세력과 자본가들이 사회변화를 주도했던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에 순응 또는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했었다. 한국사회에 몸담고 있으므로 한국 사회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과 거부할 수 없는 억압 앞에서는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諦念)이 그의 작품의 기저를 이루고 있음이 확연히 감지된다.
정희성이 1978년에 발표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도 순응과 적응 사이에서의 체념이 짙게 묻어난다. 그러나 결코 싸구려 체념은 아니다. 살필 체(諦), 생각 념(念), 생각을 살펴서 깨닫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체념과 닮았다. 자연의 이치를 상징하는 ‘흐르는 물’에 고단한 노동을 상징하는 ‘삽’을 씻고 슬픔도 내다버리는 행위에서는 세상 변화에 대한 순응의 의지가 읽혀지고, ‘샛강 바닥의 썩은 물’은 그 변화에 대한 순응 과정에서의 거부감의 배출로 보이며,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고독하고도 처절한 적응 의지가 확연히 감지된다. 이 작품이 사회참여 시의 한계를 벗어나 또 다른 일말의 감동을 덤으로 주는 것도 ‘삽’과 ‘샛강 바닥 썩은 물’과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을 모두 ‘흐르는 강물’로 정화하여 떠내려 보내는 체념과 달관(達觀)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휘 선택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나름대로 시적 카타르시스(katharsis)가 느껴진다는 말이다. 박정희 유신독재 말기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작품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어두워서 다 읽고 나면 뒤끝이 우울해지는 게 결정적인 흠이라면 흠. 그래서, 덜 다듬어진 것 같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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