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0일 토요일

목포의 눈물-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1930년대 목포 시가지 전경. 멀리 삼학도가 보인다.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찧타 옛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1935년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 이난영(李蘭影) 노래> 


반도 사람 치고 목포(木浦)가 항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없을 것 같은데...'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가 있다? 그렇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는 '뽕짝'이다? 그것도 그렇다. '뽕짝' 하면 한국인들은 6,70년대의 이미자나 남진 나훈아를 떠올리지만 기실은 일본인들이 고유의 민속음악에 미국서 유행하던 리듬 '폭스 트롯트(Fox Trot)'를 접목시킨 '엔카[演歌]'라는 게 정설, 영어 발음이 서투른데다가 'ㅌ' 발음을 잘 못하는 일본인들이 '도롯도'라고 하던 것을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열등감으로 일본과 관련된 것이면 뭐든지 눈을 흘기는 한국인들이 뽕짝 뽕짝 뽕짜작 뽕짝 2/4 박자 또는 4/4박자를 의성(擬聲)하여 '뽕짝'이라고 비하했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겉으론 일본을 미워하면서도 일본에 의해 근대화된 탓에 일본 것 빼고나면 남는 게 별로 없어 일식집서 '사시미'와 '사케' 즐기면서 시름을 달래던 6,70년대 한국인들의 자가당착(自家撞着) 자조(自嘲)라고나 할까, 줄여 말하자면 '뽕짝'은 한일 양국의 과거와 현재를 적나라하게 까발려주는 단어들 중의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목포'라는 항구만해도 그렇다. 일찍이 그 이름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다지만 제대로된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97년 10월 일본에 의해 개항된 이후 부터라는 것을 여태껏 일본인들을 '쪽바리'라고 부르는 한국인들도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4분의 2박자, 라단조, 약간 빠른 빠르기의 '목포의 눈물'은 예사 '뽕짝'과는 다르다. 1930년대 한반도 사회를 함축한 한편의 시(詩)다. 일제 총독부가 조선인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문화정책을 펴던 1935년 초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주최한 제1회 ‘전국 6대 도시의 향토찬가’ 공모전에 무명 시인 청년 문일석(文一石)이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 당선됐고,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어서 일본서 음악을 공부한 작곡가 손목인(孫牧人)의 곡을 붙였고, 그걸 목포 출신의 십대 후반 신인 가수 이난영(李蘭影)에게 부르게 해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목포 출신 청년이 그려낸 목포의 정서를 목포 출신의 여가수가 불렀다고 해서 목포 사람들은 '1980년 5·18로 희생당한 전라도의 애국가'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니 '해태 타이거스의 응원가'니 뭐니 유달산 중턱에 노래비를 세워놓을 정도로 기리고 있지만 민족주의나 향토색 걷어내고 보면 목포 사람들은 물론 그 시대 한반도 사람들과 일본인들의 감성을 함께 아우른 명작으로 보는 게 옳을 듯 싶다. 혹자는 2절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를 임진왜란 때 왜적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과 곧바로 연결시켜 민족적 열등감을 삭히기도 하지만, 노래 자체가 일본풍 '뽕짝'이어서 일본인들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1914년 대전-목포간 호남선 철도를 개통하는 등 보잘 것 없던 포구 목포를 당시 인구 6만의 조선 6대 도시의 하나로까지 키웠던 일본인들이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피압박 조선 사람들의 정한 표출을 적당히 눈감아 주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 못했을 터, '목포의 눈물'을 목포에만 묶어두는 데에는 고개가 좌우로 흔들어진다. 시가 시인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것이듯, '목포의 눈물' 또한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은 음반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이 불운하여 49세에 세상을 뜬 이난영이나 서슬 퍼렇던 일제 강점기 군국주의 미화 가요를 작곡하여 '친일 부역자'로 낙인 찍힌 손목인의 것이 아니라 어느 때 어디서라도 호젓하게 즐겨 부르는 사람들의 것이 아닐까. '목포의 눈물'이 유행의 파도 깊이 숨어들어 잊혀지는 여타 유행가와는 달리 지금껏 애창되고 있는 것도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 '뽕짝'의 차원을 훌쩍 넘어섰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해방 후 발매된 이난영의 히트곡 모음 음반.
'목포의 눈물'은 여럿이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로 부르기보다는 혼자서 술 한잔 홀짝이면서 시로 읽는 게 더 가슴에 와닿는다. 그 시를 지었다는 문일석도 예사 인물이 아니었던 듯 싶다. 와세다 대학 유학생으로서 본명이 '윤재희'였고 일제 징용을 피해 돌아다니다가 병을 얻어 1944년 2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는 미확인 전설(?)은 차치하더라도, '목포의 눈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와 일본에서 울려퍼졌건만 “내가 바로 문일석”이라고 자랑한 사람은 커녕 그 가족 조차 나타나지 않은 '그럴만한 이유'도 궁금하거니와, 한반도에서 현대시가 겨우 모양을 갖춰가던 그 시절에 무명 문학청년이 당대 어느 유명 시인도 함부로 흉내내지 못할 공감각적(共感覺的) 대구(對句)들을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엮어냈다는 게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구절구절 다시 음미해보자. 사공의 뱃노래가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가운데 깊은 밤 흘러가는 조각달이 옛상처를 새록새록 떠올리게 한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이라는 회한의 탄식이 어찌 절로 터져나오지 않겠는가! 감상적 이미지의 단어들을 적당히 나열해놓고 시라고 우기던 그 때 그 시절의 시작(詩作)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칭찬이 아깝지 않다. 

노래는 세월 따라, 세월은 노래 따라? 해방 전 10대 후반의 신인 이난영이 특유의 비음(鼻音)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으로 '목포의 눈물'을 불러 일본서 들여온 축음기를 돌리고 또 돌린 데 이어 해방 후 먹고 살만해진 일본인들이 한반도 식민지 시절의 향수에다 기생관광을 덤으로 얹어 즐기던 1970년대 이난영의 아들뻘 가수 조용필이 특유의 쉰소리와 흐느끼는 듯한 창법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가라오케 술집의 마이크를 적시고 또 적신 게 우연인가? 한국과 일본 양국이 일제하 징용 및 위안부 배상문제를 놓고 수출규제가 어쩌고 지소미아(GSOMIA-1945년 광복 이후 한·일 양국이 맺은 유일한 군사협정) 파기가 저쩌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가운데 목포 출신 판소리 명창 박금희로부터 수궁가 춘향가를 사사받으면서 목청을 틔웠다는 이난영 손녀뻘 가수 송가인이 조선일보 계열사 TV조선 주최 '내일은 미스트롯' 경연에서 `우승하여 스타덤에 올랐다? 한 세기 전 목포 앞바다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들었던 '목포의 눈물'이 국가간 체면과 이익의 충돌이 불꽃 튀기는 21세기 동아시아 혼돈의 깊은 밤을 흘러가는 조각달을 다시 적시고 있는 것만 같아 쓴웃음이 절로 머금어진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일본 식민 지배에 대한 원한과 열등감을 떨친 한국인들이 총칼로 한반도 사람들을 억눌렀던 것을 반성하는 일본인들과 함께 '목포의 눈물'을 즐겨 부를 수 있을는지...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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