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9일 목요일

Vanity-부질없는 것들의 부질 있음

텍사스 주 오스틴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오 헨리 기념 박물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오 헨리는 오스틴 시절 1890년대 중반에 지어진 이 집에 거주하면서 아내 아톨과 함께 딸을 키웠다. 


Vanity(부질없음)

A Poet sang so wondrous sweet 
한 시인이 놀랍도록 감미롭게 노래했네
That toiling thousands paused and listened long; 
수많은 사람들이 숨을 멈추고 오래 귀 기울일 정도로
So lofty, strong and noble were his themes, 
테마들이 아주 고결하고, 강하고, 고상했지
It seemed that strength supernal swayed his song. 
마치 천상의 힘이 그의 노래를 흔들어주는 것 같았어

He, god-like, chided poor, weak, weeping man, 
그는, 마치 신처럼, 가난하고 유약하고 징징대는 인간을 꾸짖었네
And bad him dry his foolish, shameful tears; 
그리고는 아둔하고 부끄러운 눈물을 닦으라고 했지
Taught that each soul on its proud self should lean, 
모든 영혼은 저마다의 자긍심에 의지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줬어
And from that rampart scorn all earth-born fears.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두려워하는 경멸을 방어하려면.

The Poet grovelled on a fresh heaped mound, 
그 시인은 새로 솟은 언덕 위에서 기었지
Raised o'er the clay of one he'd fondly loved; 
아주 좋아하던 그 언덕의 진흙 위에서 컸어
And cursed the world, and drenched the sod with tears 
그리고는 세상을 저주했네, 그 흙을 눈물로 흠뻑 적시면서 말이야
And all the flimsy mockery of his precepts proved. 
자신이 깨달아 얻은 교훈들이 하잘 것 없는 조롱거리 흉내내기라는 걸 보여줬다네.

                                          <오 헨리(O. Henry): 1862년–1910년>

울 찬비가 내린다. 버려진 거리,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해서 더 썰렁해 뵌다. 뉴욕시 변두리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도 이성을 잃은 듯하다. 하늘을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다. 광기마저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들은 온기를 찾아 헤매고 죽어 있는 것들은 자유를 만끽한다. 영화가 끝나고, 음악에 맞춰 스크린 한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배우와 제작진의 이름들마저 끊어지고, 모든 관객이 다 빠져나갔을 때, 텅 빈 극장 안 맨 뒷줄 좌석에 버려진 것 같은 공허함이 길모퉁이 시커먼 쓰레기통에 차고 넘친다. 코트의 얇은 천 조직을 뚫고 파고드는 한기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은 초라한 자학, 갈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사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혼자만 그런 건 아니니까. 몇 달 전만 해도 따사로운 햇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붉은 벽돌담을 타고 흘러내려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깔리는 빗물 역시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오스틴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글을 쓰던 시절의
O. 헨리.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중 공금을 횡령하여 5년형을 선고받고 3년간 감방살이 후 모범수로 풀려난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 1862년–1910년)가 O. 헨리(O. Henry)로 이름을 바꾸고 불과 10년 남짓한 기간 300편 가까운 단편을 썼던 것도 겨울 찬비가 내릴 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던 건 아닌가? 일상이 자질구레하게 느껴져서, 모든 게 부질없다고 여겨져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마저도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미친 듯이 글을 써서 뭔가 확인해보려고 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심심풀이 땅콩으로 그의 대표작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를 다시 읽고는 찬비 내리는 그리니치빌리지를 어슬렁거리며 베어맨(Behrman)이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존시(Johnsy)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그린 것 같은 담쟁이 넝쿨 잎을 하나라도 찾아보려고 애써본 사람들도 동의하리라. 마지막 잎새는 존시의 희망이 아니라 자신이 그린 가짜 잎새로 존시를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베어맨의 희망이었다는 것을. 그리니치빌리지의 골목들이 지저분한 욕망과 불안으로 꾸불텅꾸불텅 뒤엉켜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뉴욕 뒷골목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통해 따뜻한 휴머니즘을 그렸다”는 평론가들의 작품평이 부질없기만 하다.

O. 헨리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그가 이따금 시를 썼다는 사실은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의 단편소설들이 너무 유명하여 눈치 채지 못했을 거라고 얼렁뚱땅 제쳐놓는 뻔뻔한 부끄러움으로 읽고 또 읽어본다. 시나 소설이나 그게 그거, 쓰는 사람의 머릿속 생각이 시의 형태를 갖추든 소설로 풀어지든 무슨 차이가 있으랴. O. 헨리가 우울한 감상주의자였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한다. 시든 소설이든 세월이 지나고 나면 부질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거라는 불안감이 컸던 것 같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던 시절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발행했던 주간지 ‘롤링 스톤(The Rolling Stones)’에 발표했던 시 ‘Vanity(부질없음)’도 그런 불안의 표출로 보인다. O. 헨리가 자신의 작품들을 발표하는 창구로 이용했던 ‘롤링 스톤’은 발행부수가 한때 1,500부에 이르기도 했지만 생활을 꾸려갈 정도의 수입이 되지 않아 결국은 때려치우고 만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고결하고 강하고 고상한 시상(詩想)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때쯤이었으리라. 우리말로 ‘덧없음’ ‘허무’ ‘공허’ ‘허영’ ‘허식’ 등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vanity’의 뿌리는 ‘텅 빔’ ‘헛됨’을 뜻하는 라틴어 ‘vanitas’이고 ‘vanitas’는 원래 “자기 자신을 속이다”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바, 혹여 O. 헨리가 자신의 글쓰기나 삶까지도 ‘헛된 자기기만’으로 여겼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문학적 단상을 ‘하잘 것 없는 조롱(flimsy mockery)’이라고 비하하면서도 뭔가 끄적거리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던 O. 헨리가 안쓰럽기도 하고. 

비에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불용(不容)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입술을 깨물면서 ‘마지막 잎새’를 썼던 O. 헨리의 눈물처럼. 먹고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열정이 ‘하찮은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는 ‘부질없음’이라는 시까지 남긴 시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헤아려보는 게 독자의 의무라고 여기는 것도 부질없는 짓인가?! 자기 자신을 기만이라도 해서 부질없는 것을 끌어안지 않으면 세상은 더욱 더 외롭고 허망해질 터, 시인 O. 헨리의 우울한 ‘부질없음’을 독자의 ‘부질있음’으로 감싸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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