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퀸즈 플러싱 개천변 풍경. |
증진상(贈陳商; 진상에게 주다)
長安有男兒 二十心已朽 (장안유남아 이십심이후)
장안에 한 남자 있어, 나이 이십에 몸과 마음이 푹 썩어버렸네
楞伽堆案前 楚辭繫肘後 (능가퇴안전 초사계주후)
능가경이 책상 앞에 쌓이고 초사가 팔꿈치 끌어당기네
人生有窮拙 日暮聊飮酒 (인생유궁졸 일모료음주)
사는 게 곤궁하고 쓸모없어서 해 지면 술잔이나 기울이네
只今道已塞 何必須白首 (지금도이색 하필수백수)
지금 길이 막혔거늘 어찌 백발이 될 때까지 기다리리
凄凄陳述聖 披褐鉏俎豆 (처처진술성 피갈서조두)
처량하고 처량하구나 진술성이여, 베옷 걸치고 호미질하고 제사나 지내고 있다네
學爲堯舜文 時人責衰偶 (학위요순문 시인책쇠우)
배움이 요순의 문장에 이르러도 세상 사람들은 쇠약하다고 꾸짖네
柴門車轍凍 日下楡影瘦 (시문거철동 일하유영수)
사립문에 수레바퀴 자국 얼어붙고 해질 녘 느릅나무 그림자 수척한데
黃昏訪我來 苦節靑陽皺 (황혼방아래 고절청양추)
황혼이 나를 찾아와 절조 힘들게 지키려니 푸른 햇살마저 주름지네
太華五千仞 劈地抽森秀 (태화오천인 벽지추삼수)
태화산은 오천 길이나 되어 땅을 갈라 나무들을 빼어나게 키워내고
旁古無寸尋 一上戛牛斗 (방고무촌심 일상알우두)
주변에 겨룰만한 게 없어서 한 번 솟아 견우성과 북두성을 찌르는데
公卿縱不怜 寧能鎖吾口 (공경종불령 영능쇄오구)
높으신 분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더라도 어찌 내 입까지 막으랴
李生師太華 大坐看白晝 (이생사태화 대좌간백주)
나도 태화산을 스승 삼고 크게 앉아 밝은 낮을 바라봤건만
逢霜作樸樕 得氣爲春柳 (봉상작박속 득기위춘류)
서리를 만나면 잡목이 되지만 기를 얻으면 봄버들이 된다더니
禮節乃相去 顦顇如芻狗 (예절내상거 초췌여추구)
예와 절이 서로 떠나가니 초췌하기가 풀강아지 같네
風雪直齋壇 墨組貫銅綬 (풍설직재단 묵조관동수)
풍설로 재단 바로 잡고 검은 끈으로 동수 꿰차려 했지만
臣妾氣態間 唯欲承箕帚 (신첩기태간 유욕승기추)
계집 같은 기세와 자태로 키질과 빗자루 질이나 하고 있으니
天眼何時開 古劍庸一吼 (천안하시개 고검용일후)
하늘 눈이 언제 열려 옛 검 휘두르며 큰소리 쳐보나
<이하(李賀); 790~816>
염세주의(厭世主義, pessimism)는 세상이 불합리하고 비애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 한자 싫어할 염(厭)은 지붕이나 너럭바위 아래의 막힌 공간을 그린 엄(厂) 속에 ‘물리다’ ‘싫어하다’라는 의미의 염(猒)자가 들어있는 형상으로서 답답한 가운데서 물리고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주관적이다. 반면 영어 ‘pessimism’의 뿌리는 ‘최악’을 뜻하는 라틴어 ‘pessimus’로서 ‘pessimism’, 보는 이가 ‘worst’를 보느냐 ‘best’를 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객관적이다.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자신의 느낌에 따라 사물이나 세계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한자문화권 사람들과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사물이나 세계가 달라 보인다고 믿는 영어문화권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느껴진다.
이하의 초상(출처-中文百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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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과거보다 살아갈 미래가 더 많은 사람들을 ‘청춘(靑春)’이라고 한다. 요즘 청춘은 젊은이를 뜻하는 말로 변해버렸지만 원래는 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대 중국의 오행(五行)으로 풀이하면 봄은 파란 청(靑), 여름은 붉을 적(赤), 가을은 흰 백(白), 겨울은 검을 현(玄)에 해당하는바, 그래서 인생을 청춘(靑春)·주하(朱夏)·백추(白秋)·현동(玄冬)이라는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했었다. 봄날의 청춘은 앞날이 창창하여 뭔가 잘못돼도 그걸 바로 잡을 가능성이 크기에 쉽게 절망하지 않고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뭔가로 인해 절망하여 염세주의에 푹 빠져 있다면? 봄날의 꽃가지가 꽃봉오리를 맺기도 전에 시드는 꼴, 그 꼴이 되었으니 오죽하겠느냐는 동정과 연민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자고이래 그런 동정과 연민을 시로 읊은 시인들이 수두룩했었다. ‘귀재절(鬼才絶)’이라고도 불렸던 중국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년~816년)도 앞길이 콱 막힌 나머지 염세주의에 푹 절여진 청춘이었다. 그가 낙백하여 술로 울분을 달래던 시절에 쓴 것으로 보이는 ‘진상(陳商: ?-855))에게 주다(贈陳商)’를 보면 삶에 대한 의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이 이십에 마음이 이미 썩어서(二十心已朽), 세상만사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는 불가의 능가경(楞伽經)이나 탐독하고(楞伽堆案前), 중앙 정계에서 쫓겨나자 세상 원망하다가 돌덩이를 껴안고 멱라(汨羅)에 몸을 던진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초사(楚辭)’나 읊조리고 있음을 본다.
어떤 사람들은 이하가 뛰어난 문재(文才)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인정받지 못한 진상을 동정하여 이 시를 썼다고 주장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지 않나 싶다. 이하는 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2년 즉 서기 807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낙양(洛陽)으로 올라왔으나 부친의 이름 ‘진숙(晉肅)’의 ‘진(晉)’과 진사(進士)의 ‘진(進)’이 같은 발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응시기회를 박탈당해 낙향했고, 808년 겨울 장안(長安)으로 가서 벼슬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겨우 음서제(蔭敍制)로 종9품 봉례(奉禮) 자리를 얻어 제사 심부름이나 하다가, 813년 봄 “봉례 말직에서 더 무엇을 기대하랴”라고 탄식하면서 낙향했었다. 그러다가 장안 시절의 친구 장철(張徹)에게 도움을 청하여 관직을 구하고자 노주(潞州, 지금의 산서성 장치현)로 향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귀향했고 이후 우울증으로 인한 병을 얻어 817년 숨을 거두고 만다. 향년 27세였다. 반면 출생연도가 미상이지만 이하의 후배로 보이는 진상은 원화 9년 즉 814년 과거에 급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와 예부시랑(禮部侍郎)을 거처 비서감(秘書監)을 역임하면서 문집 7권을 남기고 또 824년에서 826년까지 재위했던 경종(敬宗)의 실록(實錄) 10권을 편찬하기도 했었다. 이 시는 이하가 봉례랑에 임명되던 스무 살 시절 즉 809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바, 당시에는 진상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이었으므로 뜻을 펴지 못하는 진상을 동정했다기보다는 이하 자신의 신세 한탄으로 보는 게 옳거니와, 그러므로 “凄凄陳述聖 披褐鉏俎豆(처처진술성 피갈서조두)”라는 구절도 진술성이 처량하다는 게 아니라 “진술성(‘술성’은 진상의 자)이여, (내 신세가) 처량하고 처량하구나, (봉례랑이 되어) 베옷 걸치고 호미질하고 제사나 지내고 있다네”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재주를 인정받지 못해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는 선배가 전도유망한 후배를 붙잡고 늘어놓은 술주정쯤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이하의 시작(詩作)에 귀신이나 죽음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염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나 거꾸로 보면 염세주의 덕분에 이하가 ‘귀재절’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실소가 머금어지기도 한다. 자고로 희망보다는 절망, 기쁨보다는 슬픔, 낙천주의보다는 염세주의가 시를 두께를 두껍게 하고 깊이를 깊게 해왔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이하의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널리 읽혀지는 게 그 만큼 많은 청춘들이 염세주의에 빠져 이하와 공감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만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눈길 가는 시 입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상을 못마땅하게 여기면 시인이 되고 세상을 우습게 여기면 술 주정뱅이가 되던가요? 시인 이하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 작품을 썼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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