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尹東柱); 1917년~1945년>
교회라는 말의 어원을 뒤적거려보면 그리스어의 ‘에클레시아(ekklesia)'와 ’키리아케(Kyriake)'가 등장한다. 에클레시아는 “시민의 집, 의회”를 의미하며, 키리아케는 “주님에게 속한다”는 뜻으로 독일서는 지금도 교회를 ‘키르헤(Kirche)’라고 부른다. 초기교회는 이 말을 유대교와 이방종교로부터 구별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는 특수집단”이란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리스도를 주(主)로 모시는 집단인 교회는 그 발생 초기에는 예수의 열두 제자 등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모이는 공동체였으나 시대의 변천과 함께 민족 단위의 교회 혹은 전체적인 공동교회로 그 성격이 변하다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리스 정교회,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 등으로 분화되었다가, 다시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환경과의 연관 속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교회로 발전해왔다.
스페인 화가 디에고 발라케즈가 1632년에 그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
모든 교회의 가장 높은 곳에는 십자가(十字架)가 달려 있다. 어설픈 기독교 신자들은 십자가를 기독교의 신성한 전유물로 여기지만 천만의 말씀, 십자가는 예수 이전 고대부터 만들어졌고 로마 제국에서는 십자가형(Cruxification)에 쓰이던 사형 틀이었다는 상식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의 세로는 예수와 예수를 믿는 신자를 연결하고 가로는 신자와 신자를 연결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을 인정받으려면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건 이후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기독교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먼저 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입만 벌리면 ‘믿습니다’를 외치기보다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예수처럼 타인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나?”하고 자문해보는 것이 기독교 신자의 첫걸음인바,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아 놓은 것 또한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이타적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만 오라는 표시로 받아들이면 틀림이 없다.
한국에서 개신교 신자 비율이 처음으로 불교를 앞지른 것은 지난 97년이었다. 당시 한국갤럽이 전국의 18세 이상 남녀 1천6백13명을 대상으로 ‘제3차 한국인의 종교실태와 종교의식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개신교인의 비율이 20.3%로 나타나 18.3%에 그친 불교신자를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었다. 개신교인 비율은 84년 같은 조사에서 17.2%, 89년에는 19.2%로 불교에 비해 1.6~1.7% 포인트 뒤졌었으나 97년 조사에서 2% 포인트나 앞질러 국가적으로 선포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명실공이(?) ‘기독교 국가’가 됐다. 한국인 대다수가 한국의 어느 거리에서든 교회 십자가를 볼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너무나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 ‘기독교 국가’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뉴욕한인사회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왕국’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뉴욕 메트로 지역 일원의 한인 교회 수는 차고에 십자가 붙여놓고 목사 부부가 찬송가 부르는 개척교회에서부터 신도수가 1만여명에 육박하는 대형교회까지 줄잡아 8백여개, 신학교가 30여개, 관련 언론기관이 10여개, 수양관이 20여개다. 왜 교회 내에서 이간질을 하느냐며 목사가 성가대 지휘자의 멱살을 잡든 말든, 팔뚝 빠지도록 손발톱을 다듬어 헌금을 하면 그 헌금으로 ‘존경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TV방송에 내보내든 말든, 가게 속여 팔아먹었다며 집사와 장로가 언성을 높이든 말든, 장로가 헌금을 슬쩍 착복했든 말든, 적어도 겉으로는 가장 믿음이 돈독한 소수계로 손꼽히고 있다.
시인 윤동주 |
어쨌거나 할렐루야? 천만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집에 하나씩은 모셔두고 있는 십자가가 기실은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고 날마다 그 형틀을 바라보면서 이웃에 사랑을 베풀 것을 다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살려고 애썼던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년~1945년) 또한 긴 한숨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 저을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부농으로 독실한 기독교 장로였던 조부 윤하현이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 정착한 연고로 어린 시절 윤하현의 손에 이끌려 명동촌의 명동교회에 다녔던 윤동주는 기도하듯 자기를 성찰하는 시를 썼었다. 명동교회 시절을 회상하며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 ‘십자가’도 그 중 하나다. 쫓아오던 햇빛이 높은 첨탑 꼭대기의 십자가에 걸렸다는 감각적 표현도 신선하지만, 예수를 인간적으로는 ‘괴로웠던 사나이’ 그러나 이타적인 사랑으로는 ‘행복(幸福)한 그리스도’로 묘사하고 있음에 기독교리의 핵심을 제대로 꿰뚫었다는 칭찬이 아깝지 않고,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는 겸손하면서도 결연한 신앙고백으로 마무리 짓고 있음에 윤동주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깨쳤던 진짜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내면의 성찰이 그의 작품의 주조를 이뤘던 것도 그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믿는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겠다는 기독교인들을 찾아보기가 힘든 왜곡된 현실을 반성해야 한다. 윤동주의 ‘십자가’를 신자들 돈 뜯어 키운 교회를 주식회사처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는 한국의 목사들에게 읽어주고 또 읽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