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4일 화요일

Disillusionment of Ten O'clock - 파란 눈 시인의 색즉시공(色卽是空)


Disillusionment of Ten O'clock (10
시 정각의 환멸)

 

The houses are haunted 그 집들은 홀려 있어

By white night-gowns. 흰색 잠옷들에 의해.

None are green, 어떤 것도 초록색이 아니네.

Or purple with green rings, 초록색 링이 달린 자주색도

Or green with yellow rings, 노란색 링이 달린 초록색도

Or yellow with blue rings. 파란색 링이 달린 노란색도 아니야.

None of them are strange, 그 어느 것도 낯설지 않아,

With socks of lace 레이스 양말이나

And beaded ceintures. 구슬 꿴 허리띠를 곁들여도.

People are not going 사람들은 꿈꾸지 않을 거야

To dream of baboons and periwinkles. 비비(狒狒)와 고둥을.

Only, here and there, an old sailor, 단지, 여기저기, 한 늙은 뱃사람,

Drunk and asleep in his boots, 술에 취해 장화 신은 채 잠들어

Catches Tigers 호랑이를 잡는구나,

In red weather. 붉은 날씨 속에서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


이 태초(太初)에 천지를 창조한 후 빛이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빛이 있었다? 종교적 믿음과는 상관없이 태초에 빛이 있었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 인간 눈의 안쪽은 망막으로 덮여 있고 망막에는 원추세포(圓錐細胞)간상세포(杆狀細胞)가 있어 빛을 감지하는데, 그 빛이 신경절 세포를 통해 뇌로 전달되어 색과 모양 등이 판별되는 바, 모태에서 나온 인간이 두 눈을 뜨고 최초로 빛을 보는 그 순간이야말로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태초일 테니까. 그런데 그 빛 속에 색()이 있었다는 것 또한 까먹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프리즘으로 가시광선(可視光線)을 분광하면 보라, , 파랑, 초록, 노랑, 주황, 빨강이 나타난다. 사물이 제각각의 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사물마다 반사하는 색이 다르기 때문, 그 색의 인식 또한 각자의 유전자에 따라 제각각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포착하고 자신의 뇌로 인식하는 색만 본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빛이 절대적인 신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색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것, ‘()’이라는 말의 뿌리도 절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자 ()’은 사람 인()과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은 모양의 절()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 무릎을 꿇고 앉는다는 것은 뭔가를 기구(祈求)하거나 처분을 기다리거나 또는 용서를 빌 때 취하는 자세였던 바, 그 때의 얼굴색이 마음을 표현한다고 해서 안색또는 빛깔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영어 ‘color’의 조어(造語) 과정도 ()’과 유사하다. ‘color’의 뿌리는 감춤을 뜻하는 고대 라틴어 ‘colos’로서, 거기서 얼굴색’ ‘피부색을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 ‘color’가 나왔고, 그게 13세기 경 영어권으로 넘어왔다. 얼굴색은 흥분하면 붉어지고 공포에 질리면 하얗게 변하고 근심걱정에 휩싸이면 어두워지기에 적() () () 따위의 색깔까지 통칭하게 됐지만, 색은 본디 마음의 표출이므로,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행간도 읽혀진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금과옥조로 삼는 불교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가르친 게 아닌가 싶다. 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그 말의 원문은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인 바, 느낌과 생각하고 아는 것을 행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그것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인연으로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이므로 집착하지 말라는 충고로 받아들여진다.

 맞다.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만을 본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일체유심조다. 그런 색즉시공의 관점에서 본다면 20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의 이미지스트(imagist)들이 주도했던 모더니즘(modernism) 시 운동 또한 시인 자신이 본 색()을 중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존하는 낭만주의(浪漫主義)나 자신의 주관성보다는 사상(事象)의 객관성만 강조하는 사실주의(寫實主義)에 반발하여 자신의 눈으로 포착한 이미지(image)를 주요 도구로 삼았다. 심상(心象)이라고 번역되는 ‘image’는 말 그대로 뭔가를 보거나 생각할 때 마음에 그려지는 그림, 불교에서 말하는 색()과 딱 맞아떨어진다.

월러스 스티븐스 시선집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 미국의 이미지스트 시인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가 생전에 불교를 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을 깨친 것 같다. ‘10시 정각의 환멸(Disillusionment of Ten O'clock)’도 그런 깨달음의 증거로 보인다.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란한 색채 속의 실재(reality)와 상상(imagination)과 믿음의 허구(Supreme fiction) 사이의 상관(相關)을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 “흰색의 잠옷들에 의해 홀려 있다는 것은 유채색(有彩色)인 초록색(green) 자주색(purple) 노란색(yellow) 파랑색(blue)의 이미지가 무채색(無彩色)인 흰색의 이미지로 덮여버릴 수도 있다는 색즉시공’, “그것들 중 그 어느 것도 낯설지 않네는 레이스 장식 양말이든 작은 구슬 꿴 허리장식이나 어깨 띠이든 이미지 환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깨달음, 그 색즉시공과 깨달음으로 인한 상상과 믿음이 허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뜬금없이 비비와 고둥을 등장시킨 가운데 한 늙은 뱃사람이 장화를 신고 술에 취한 채 빨간(red) 날씨 속에서 호랑이를 잡는 환상으로 마무리한다. ‘baboon’은 흉측하고 못 생긴 개코원숭이를 뜻하지만 속어로는 개코원숭이처럼 추악한 인간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periwinkle’는 거무튀튀하고 못 생긴 고둥을 뜻하는 바. 뜨거운 여름날 술에 취해 널브러진 늙은 뱃사람이 꿈속에서 호랑이 잡으려고 날뛰는 이미지로 앞서 언급한 색깔들을 뒤섞어버리고 있음을 본다. 색의 실재가 상상 속에서는 어떤 이미지를 환기하고 또 그 이미지가 어떤 허구로 나타나는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제목 속에 미몽(迷夢)’ ‘환멸(幻滅)’을 뜻하는 ‘Disillusionment’를 삽입한 것도 실재를 보고 환기한 이미지나 꿈속에서의 이미지나 마찬가지라는 깨달음의 표현, 그래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는지 시어의 모양이나 음조(音調)까지 활용하고 있는 바, 동그란 링(ring)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링의 숫자만큼 ‘Or’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해 잠든 늙은 뱃사람의 잠꼬대와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청각적 이미지를 대비시키고 있음을 본다.

 유력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스티븐스는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하고 뉴욕대 로스쿨을 졸업하여 변호사가 된 후 로펌을 거쳐 코네티컷 하트포드 소재 재해보험사 부사장까지 역임하면서도 1955년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사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인과 비즈니스맨으로 성공한 인물로 꼽힌다.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교수직 제의를 받았으나 보험사 부사장 자리가 더 좋다고 사양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 만큼 그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반증이겠지만 자신이 목표한 것은 꼭 이루고야 마는 집념 또한 남달랐던 것 같다. 스티븐스가 1909년 수년 동안 사귀던 엘지 비올라 케이츨(Elsie Viola Kachel)과 결혼할 때 스티븐스의 부모가 가난한 집안 출신 딸이라고 반대하자 가족들 없이 결혼식을 올린 후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한 번도 방문하거나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스티븐스 부부가 뉴욕에서 조각가 아돌프 와인먼(Adolph Alexander Weinman)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살 때 와인먼이 엘지를 모델로 삼아 흉상을 제작한 바 있는데, 훗날 와인먼이 10센트짜리 주화 머큐리 다임(Mercury dime)’ 디자인 용역을 맡았을 때 그 흉상의 옆모습을 사용함으로써 주변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티븐스는 엘지가 우울증과 정신병을 앓아 결혼생활이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나 끝까지 이혼을 하지 않은 순정파, 인생 자체가 미몽이고 환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기에, 시작(詩作)을 통해 실재와 상상과 믿음의 색즉시공을 분석해보고 깨달은 바가 컸기에, 자신의 인생만큼은 누가 봐도 변하지 않는 고집과 순정으로 일관했는지 모르겠다

2022년 6월 24일 금요일

학이시습(學而時習)-인(仁)의 실천사항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논어(論語) 학이(學而)편>

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의 '경험(經驗)'에서 나온다. 가느다란 실을 그린 실(糸)에 베틀 사이로 날실이 지나가는 모습을 그린 물줄기 경(경)이 붙어 만들어진 지날 경(經)은 '지나가다'라는 의미, 또 험(驗)은 말 마(馬)와 다 첨(僉)이 합쳐진 것으로서 '시험하다' '검증하다'라는 의미, 경험은 개인이 세상이라는 베틀 위를 실처럼 지나면서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지각 또는 그 지각으로 결합된 지식의 축적을 말한다. 그게 개인차를 보인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똑 같은 사물에 대한 개개인의 느낌이나 인식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그런 개인차 때문이거니와, 그래서 이성에 의한 추론을 중시하는 합리주의 철학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사물 인식의 원천으로 오로지 경험만을 손꼽았었다. 

세상은 넓고 개인의 경험은 그 사람의 머리통 속만큼이나 좁다? 그렇다. 인간 세상의 모든 갈등과 충돌 또한 개개인의 경험 차이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타인의 경험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래서 각기 다른 경험들은 서로 타협할 때까지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충돌의 대가를 뻐저리게 치른 후에야 자신의 경험이 타인의 경험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게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평생 천하를 떠돌면서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세상에서의 갈등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무진 애를 썼던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의 어록 논어(論語) 첫머리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가 등장하는 것도 개개인 머리통 속만큼이나 좁은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라는 충고로 받아들이면 틀림이 없다. 지금도 중고등학교 교실에서는 영어나 수학 등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워서 써먹으라는 말쯤으로 가르치지만 그건 수박 겉핥기, 배움이라는 건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만 매달려 안달복달 아웅다웅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살아야할 숙제라는 공자의 관찰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국 산동성 소재 공자묘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외롭고 권태로운 것도 개개인의 경험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라는데 토를 달지 못한다. 그걸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자는 사족같은 설명을 추가한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어떤 사람들은 붕(朋)을 학교 운동장에서 공놀이나 함께 하면서 노는 친구나 벗 쯤으로 해석하지만 천만의 말씀, 왜 공자가 벗 우(友) 대신 무리 붕(朋)을 썼는지를 모르는 무식함의 소치다. 붕은 경험이 비슷하고 거기서 나오는 생각도 비슷하여 말이 잘 통하고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지기(知己), 그래서 이해(利害)나 주의(主義) 따위를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뭉친 무리를 '붕당(朋黨)'이라고 하거니와, 삶이 외롭고 권태로울 때 그런 붕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 세상만사를 논하면서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겁겠느냐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다.

같은 부모로부터 핏줄을 이어받아 머리가 굳어질 때가지 함께 먹고자란 형제들 사이에서도 경험과 생각은 모두 제각각, 하물며 이해타산이 거미줄처럼 얽힐 수밖에 없는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이해해주는 지기를 찾기가 쉬운가? 원초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있어서 지기 찾기는 이해관계의 파도에 실려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물거품 잡기, 그래서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을 내지 않아야 군자(君子)라는 공자의 깨달음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학이시습'이야말로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의 실천사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22년 3월 4일 금요일

유관순-지저분한 한국사회의 역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 CCGN TV 화면 캡쳐.

유관순

그리운 미친년 간다
햇빛 속을 낫질하며 간다
쫓는 놈의 그림자는 밟고 밟으며
들풀 따다 총칼 대신 나눠주며 간다
그리움에 눈감고 쓰러진 뒤에
낫 들고 봄밤만 기다리다가
날 저문 백성들 강가에 나가
칼로 물을 베면서 함께 울며 간다
새끼줄에 꽁꽁 묶인 기다림의 피
쫓기는 속치마에 뿌려놓고 그리워
간다. 그리운 미친년 기어이 간다
이 땅의 발자국마다 입맞추며 간다 

                    <1979, 창작과비평사, 정호승(鄭浩承; 1950년 1월 3일~ )>    


미가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을 '역설(逆說, paradox)'이라고 한다. 영어 'paradox'의 뿌리는 ‘반(反)’ ‘역(逆)’을 의미하는 ‘para’와 '생각하다' '보이다'라는 의미의 'dokein'이 합쳐진 고대 그리스어 'paradoxon', 수사학적으로는 '반어법(irony)'과 '형용 모순(Oxymoron)'으로 나뉘어진다. 반어법은 실수로 오물을 뒤집어쓴 사람에게 “꼴 좋다”라고 빈정거리는 것처럼 진술 자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말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가 정 반대인 반면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를 의도적으로 짜맞추어 강조 효과를 노리는 '형용모순(Oxymoron)'은 '소리없는 아우성' 등에서 보듯 진술 자체가 모순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oxymoron'은 '날카로운(sharp)' '예리한(keen)'을 의미하는 'oxy'에 '멍청한(foolish)'을 의미하는 'mōros'가 붙어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어 'oxymōros'로서 단어 자체 또한 형용모순이다.

경남 하동군 출신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나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돼 등단한 시인 정호승(鄭浩承, 1950년 1월 3일~ )은 '역설의 시인'이라고 불릴만 하다. '별들은 따뜻하다' '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에서 보듯 대부분의 작품들이 역설로 도배되어 있다. 1979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한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실린 '유관순'의 경우 “그리운 미친년 간다”라고 첫 문장부터 역설로 시작한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리운'이라는 단어와 '미친년'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역설적 표현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터, 그게 역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인 정호승을 '미친년'을 그리워하는 '미친놈'이라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칼로 물을 베면서 함께 울며 간다/ 새끼줄에 꽁꽁 묶인 기다림의 피”라는 역설적 표현 역시 자연스레 읽히는 게 아닌가?! 역설이 뭔지도 모르면서 칼로 물을 벤다든지 피를 새끼줄로 꽁꽁 묶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침 튀기는 사람들은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데 아무도 토를 달지 않으리라.

한국사회에서 정호승의 '유관순'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엊그제 3.1절을 맞아 더불어민주당 이병훈 의원이 “유관순 열사를 모욕하는 시”를 SNS에 올렸다 삭제한 것에 대해 제1야당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민주당 차원의 사과를 요구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이 대표가 페이스북에 “민주당 이병훈 의원님이 유관순 열사에 대해서 굉장한 표현상의 문제가 있는 시를 삼일절에 회람시키신 이유는 뭘까. 유관순 열사 모욕해서 어떤 지지층에 소구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글을 올려 뒷다리(?)를 건 데 대해서만 눈을 흘기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론지를 자처하는 일간지들이 '그리운 미친년'이라는 역설적 표현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 이구동성으로 “유관순 열사를 모욕하는 시”라고 떠들어댄 것도 한심하지만 그런 무식한 아우성에 떠밀려 “3·1절을 맞아 올린 게시물에 부적절한 시를 인용해서 물의를 빚었다”고 뒤통수 긁으면서 페이스북 글을 스스로 삭제한 이병훈 의원의 당당하지 못함에도 눈쌀이 찌푸려진다.

1979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슬픔이 기쁨에게'
무식한 선진국? 삼성 TV가 전세계 안방을 차지하고 현대차가 전세계 하이웨이를 질주하는 세상이 됐건만 40여년전에 지어진 창작시의 역설 하나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 “참 잘들 놀고 있다”는 '칭찬'이 절로 나온다. 영재고로 유명한 서울과학고에서 월반하여 1년 조기졸업한 후 전세계 초일류 하버드대까지 나온 이준석 대표, 광주제일고와 고려대를 나와 전남대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이병훈 의원, 한국사회의 지식인을 자처하는 유력 일간지 기자들이 정말로 '그리운 미친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눈 질끈 감고 생트집을 잡는 한국사회의 수준이 개탄스럽다. '그리운 미친년' 논란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어서 더 역겹다. '유관순'은 정호승이 1979년 창작과비평사를 통해 펴낸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실린 연작시 9편 중의 하나, 정치판에서 뉴라이트니 뭐니 하는 친일파 두둔 세력과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 코피 터지게 패싸움을 벌이던 지난 2013년 무렵 유관순 열사 유족이 “30여 년 동안 시가 인터넷 등에 돌아다니는 것을 전혀 몰랐다. 열사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모독”이라고 항의하자 진심에선지 등 떠밀려서였는지 정호승은 “순국선열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대한민국 시인으로서 석고대죄하며 참회하고 사죄 드려야 마땅한 일”이라고 사과했었다. 그런데, 지금 유관순을 '열사'로 떠받들면서 '그리운 미친년'에 대해 거품을 무는 세력이 당시엔 안중근 등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GDP 기준 경제규모 세계 10위를 넘나드는 한국의 사회가 지저분한 역설의 쓰레기통이 돼버린 것 같아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독도가 외롭게 떠 있는 바다가 한국에서는 동해지만 일본에서는 서해, 일제 강점기 시집도 안 간 처녀의 몸으로 독립 만세 운동에 앞장 서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유관순을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열사지만 일본인의 눈으로 보면 '미친년',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한 안중근도 한국인에게는 '독립운동가'이지만 일본인에게는 '테러리스트',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오락가락하면서 걸핏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를 외치는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역설'이 뭔지 다시 공부해볼 것을 권고한다. '가장 더럽고 치사한 애국자들'이라는 형용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말라는 말이다. 멍청해 보인다.

2021년 10월 20일 수요일

산행(山行) - ‘서리 맞은 붉은 잎’의 비장미(悲壯美)

베어마운틴 공원의 호수. 산비탈의 단풍도 아름답지만 호숫물 속에 잠긴 단풍이 더 아름다워보인다. 

山行(산행)

 遠上寒山石徑斜 (원상한산석경사) 멀리 서늘한 산기슭 돌길 비탈지고

白雲生處有人家 (백운생처유인가)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 한 채

停車坐愛楓林晩 (정거좌애풍림만) 수레 멈추고 앉아 짙어지는 단풍 감상해보니

霜葉紅於二月花 (상엽홍어이월화) 서리 맞은 잎들이 봄꽃보다 더 붉구나

                                                                                                                 <두목(杜牧); 803-852>

속 페달을 밟을 때마다 탱크 굴러가는 소리를 내는 고물차를 타고 ‘검소한 나들이’를 나섰다. 뉴저지 팰리세이즈 파크웨이를 달린다. 들뜬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우면 베어 마운틴으로, 절도(節度)와 결심(決心)이 필요할 때는 웨스트 포인트로, 마음이 울적하거나 고요속으로 침잠(沈潛)하고 싶을 때는 우유부단(優柔不斷)이 좋다. 파크웨이가 끝나는 곳, 베[어마운틴 언저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9W 사우스, 직진하면 픽스킬, 좀 더 돌면 웨스트포인트,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리고 빙빙 돌다가 엉겁결에 들어서면 세븐 레이크 드라이브다.

좁지만 잘 닦여진 길, 구불구불 구비를 돌아갈 적마다 산들이 호수에 제 그림자들을 담그고 울긋불긋한 단풍잎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쏟아진다. 바람이 분다. 쇄쇄, 바람을 쐬는 것을 쇄풍(曬風)이라 했다. 도시의 콘크리트 빌딩 숲에서 욕망(慾望)의 햄버거를 먹고, 오욕(汚辱)의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끝내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가끔씩 우마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숲속으로 들어와 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씻으라고 했다. 무언(無言)과 포기(抛棄)의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씻으라고 했다. 갑자기 가슴속이 시원해지면서 가뿐한 느낌이 든다. 쇄락(灑落) 그 자체다. 처녀얘들 종아리처럼 매끈한 나무들이 잎사귀들을 흔들며 새살거린다. 티 없이 맑은 파란 하늘은 언제 올려다봐도 눈이 부시다. 한가로이 떠도는 흰 구름이 내려다보며 희롱한다. 나 잡아 봐라, 나 잡아 봐라...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흰 구름을 잡을 생각이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아름답다. 자연이 아름다우냐 그 자연을 바라보는 심성이 아름다우냐를 묻는 것은 우문(愚問), 호수의 잔 물살들이 까르르 웃는다.

시인 두목의 초살화
길 한 켠에 차를 세우고 당(唐)의 시인 두목(杜牧; 803년-852년)을 흉내 낸다.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던 두목은 강직하고 호방한 성격으로 정치적 포부도 있었으나 종형이 장군과 재상의 반열에 오른데 비해 별 볼일 없는 지방관리로만 전전한 자신이 미워 스스로 시문(詩文)의 포로가 됐다고 했다. 명기(名妓)와 로맨스를 꽃피우며, 그 감정을 시로 표출했으며, 그런 시작과 술로 자신을 달랬다. 중앙 정계로 진출하지 못한 채 강호를 떠돌다 허송한 10년 세월을 한탄하여 지은 작품 ‘견회(遣懷)’를 보면 그 때 그 시절 두목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을이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칠언절구(七言絶句) ‘산행(山行)’도 그 즈음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묘미는 압운(押韻), 통상 작품을 수함경미(首頷脛尾) 네 부분으로 나눠 시흥을 고조시키는 절구의 경우 1행[首]과 2행[頷] 그리고 4행[尾]의 끝에 운을 붙이는 바, 이 작품의 운자 사(斜)-가(家)-화(花)의 경우 운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비탈길-집-꽃으로 이어지는 줌인(zoom in) 효과까지 불러일으켜 감탄이 절로 나온다. 또 ‘백운(白雲)’의 흰색과 ‘상엽(霜葉)’의 붉은 색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개운하고 명징한 느낌을 극대화하고 있음에 두보(杜甫)에 견주어 ‘소두(小杜)’로 불리는 두목의 시재가 명불허전임을 실감케 한다.

停車坐愛楓林晩(수레 멈추고 앉아 짙어지는 단풍 감상해보니)

霜葉紅於二月花(서리 맞은 잎들이 봄꽃보다 더 붉구나)

이제 곧 북풍한설에 묻혀버릴 나무들의 마지막 모습이 봄꽃보다 더 붉다? ‘서리 맞은 붉은 잎들’에서 느껴지는 비장미(悲壯美)에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 단풍(丹楓)이라는 것이 화청소(花靑素)가 붉게 변하면 빨강이 생겨나고, 엽록소(葉綠素)가 없어지면 노랑만 남는다는 것을 익히 배워 알고 있으나 인생 내리막길에 접어든 1천여 년 전의 시인이 서리를 맞아 더욱 더 붉어진 단풍을 보면서 청춘의 봄꽃을 떠올렸다는데 대해 연민과 공감을 금할 수 없다. 너무나도 처연한 관조(觀照)다. 사는 게 뭔지, 어느 새 꿈은 사라지고, 아등바등거리기도 싫고, 그렇다고 해서 아직 마음의 평화는 얻지 못한 상태, 그 고민과 번뇌가 마지막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지 않은가?! 어느 새 노랗고 빨간 단풍으로 물들고 말았다. 

2019년 12월 19일 목요일

Vanity-부질없는 것들의 부질 있음

텍사스 주 오스틴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오 헨리 기념 박물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오 헨리는 오스틴 시절 1890년대 중반에 지어진 이 집에 거주하면서 아내 아톨과 함께 딸을 키웠다. 


Vanity(부질없음)

A Poet sang so wondrous sweet 
한 시인이 놀랍도록 감미롭게 노래했네
That toiling thousands paused and listened long; 
수많은 사람들이 숨을 멈추고 오래 귀 기울일 정도로
So lofty, strong and noble were his themes, 
테마들이 아주 고결하고, 강하고, 고상했지
It seemed that strength supernal swayed his song. 
마치 천상의 힘이 그의 노래를 흔들어주는 것 같았어

He, god-like, chided poor, weak, weeping man, 
그는, 마치 신처럼, 가난하고 유약하고 징징대는 인간을 꾸짖었네
And bad him dry his foolish, shameful tears; 
그리고는 아둔하고 부끄러운 눈물을 닦으라고 했지
Taught that each soul on its proud self should lean, 
모든 영혼은 저마다의 자긍심에 의지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줬어
And from that rampart scorn all earth-born fears.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두려워하는 경멸을 방어하려면.

The Poet grovelled on a fresh heaped mound, 
그 시인은 새로 솟은 언덕 위에서 기었지
Raised o'er the clay of one he'd fondly loved; 
아주 좋아하던 그 언덕의 진흙 위에서 컸어
And cursed the world, and drenched the sod with tears 
그리고는 세상을 저주했네, 그 흙을 눈물로 흠뻑 적시면서 말이야
And all the flimsy mockery of his precepts proved. 
자신이 깨달아 얻은 교훈들이 하잘 것 없는 조롱거리 흉내내기라는 걸 보여줬다네.

                                          <오 헨리(O. Henry): 1862년–1910년>

울 찬비가 내린다. 버려진 거리,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해서 더 썰렁해 뵌다. 뉴욕시 변두리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도 이성을 잃은 듯하다. 하늘을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다. 광기마저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들은 온기를 찾아 헤매고 죽어 있는 것들은 자유를 만끽한다. 영화가 끝나고, 음악에 맞춰 스크린 한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배우와 제작진의 이름들마저 끊어지고, 모든 관객이 다 빠져나갔을 때, 텅 빈 극장 안 맨 뒷줄 좌석에 버려진 것 같은 공허함이 길모퉁이 시커먼 쓰레기통에 차고 넘친다. 코트의 얇은 천 조직을 뚫고 파고드는 한기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은 초라한 자학, 갈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사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혼자만 그런 건 아니니까. 몇 달 전만 해도 따사로운 햇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붉은 벽돌담을 타고 흘러내려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깔리는 빗물 역시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오스틴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글을 쓰던 시절의
O. 헨리.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중 공금을 횡령하여 5년형을 선고받고 3년간 감방살이 후 모범수로 풀려난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 1862년–1910년)가 O. 헨리(O. Henry)로 이름을 바꾸고 불과 10년 남짓한 기간 300편 가까운 단편을 썼던 것도 겨울 찬비가 내릴 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던 건 아닌가? 일상이 자질구레하게 느껴져서, 모든 게 부질없다고 여겨져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마저도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미친 듯이 글을 써서 뭔가 확인해보려고 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심심풀이 땅콩으로 그의 대표작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를 다시 읽고는 찬비 내리는 그리니치빌리지를 어슬렁거리며 베어맨(Behrman)이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존시(Johnsy)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그린 것 같은 담쟁이 넝쿨 잎을 하나라도 찾아보려고 애써본 사람들도 동의하리라. 마지막 잎새는 존시의 희망이 아니라 자신이 그린 가짜 잎새로 존시를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베어맨의 희망이었다는 것을. 그리니치빌리지의 골목들이 지저분한 욕망과 불안으로 꾸불텅꾸불텅 뒤엉켜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뉴욕 뒷골목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통해 따뜻한 휴머니즘을 그렸다”는 평론가들의 작품평이 부질없기만 하다.

O. 헨리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그가 이따금 시를 썼다는 사실은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의 단편소설들이 너무 유명하여 눈치 채지 못했을 거라고 얼렁뚱땅 제쳐놓는 뻔뻔한 부끄러움으로 읽고 또 읽어본다. 시나 소설이나 그게 그거, 쓰는 사람의 머릿속 생각이 시의 형태를 갖추든 소설로 풀어지든 무슨 차이가 있으랴. O. 헨리가 우울한 감상주의자였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한다. 시든 소설이든 세월이 지나고 나면 부질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거라는 불안감이 컸던 것 같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던 시절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발행했던 주간지 ‘롤링 스톤(The Rolling Stones)’에 발표했던 시 ‘Vanity(부질없음)’도 그런 불안의 표출로 보인다. O. 헨리가 자신의 작품들을 발표하는 창구로 이용했던 ‘롤링 스톤’은 발행부수가 한때 1,500부에 이르기도 했지만 생활을 꾸려갈 정도의 수입이 되지 않아 결국은 때려치우고 만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고결하고 강하고 고상한 시상(詩想)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때쯤이었으리라. 우리말로 ‘덧없음’ ‘허무’ ‘공허’ ‘허영’ ‘허식’ 등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vanity’의 뿌리는 ‘텅 빔’ ‘헛됨’을 뜻하는 라틴어 ‘vanitas’이고 ‘vanitas’는 원래 “자기 자신을 속이다”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바, 혹여 O. 헨리가 자신의 글쓰기나 삶까지도 ‘헛된 자기기만’으로 여겼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문학적 단상을 ‘하잘 것 없는 조롱(flimsy mockery)’이라고 비하하면서도 뭔가 끄적거리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던 O. 헨리가 안쓰럽기도 하고. 

비에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불용(不容)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입술을 깨물면서 ‘마지막 잎새’를 썼던 O. 헨리의 눈물처럼. 먹고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열정이 ‘하찮은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는 ‘부질없음’이라는 시까지 남긴 시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헤아려보는 게 독자의 의무라고 여기는 것도 부질없는 짓인가?! 자기 자신을 기만이라도 해서 부질없는 것을 끌어안지 않으면 세상은 더욱 더 외롭고 허망해질 터, 시인 O. 헨리의 우울한 ‘부질없음’을 독자의 ‘부질있음’으로 감싸주고 싶다. 



2019년 12월 16일 월요일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순응(順應)과 적응(適應) 사이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저물어가는 세월의 강물에 올 한 해를 일군 삽을 씻으면서 순응을 연습해본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 창작과비평사, 정희성(鄭喜成); 1945년- >

한 해가 저물어간다. 어디 저물어가는 게 올 한 해뿐이랴. 세상도 저물어왔고, 나도 저물어왔고,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도 저물어왔으리라. 그게 피부로 느껴진다. 매해 연말, 1년 중 특정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소회와 어줍잖은 감상들에 지나지 않건만 왜 이다지도 새롭게 느껴지는 건가? 그런 것들을 겪을 만큼 겪어 이제는 이력이 생겼다는 듯이 담담하게 다독거리는 것을 순응(順應)이라고 했던가? 

한자 순(順)은 내 천(川)에 머리 혈(頁)이 붙어서 된 것으로서, 머리를 흐르는 물에 처박는 모양을 연상케 한다. 혹자는 “흐르는 물과도 같은 성현의 도리에 머리를 숙이고 따르다”라고 해석하지만 천만의 말씀, 윗사람 말을 잘 듣는 것을 ‘순(順)하다’라고 표현하면서 갑순이 미순이 호순이에게 ‘순(順)’자를 붙인 사람들의 축소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노자(老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흐르는 물’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성현의 도리’보다 훨씬 더 위에 위치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자연의 이치에 따르다’라는 의미의 순리(順理)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고, 순리에 적응하여 익숙해지는 것을 ‘순응(順應)’이라고 했다. 

흔히 ‘순응’과 ‘적응(適應)’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말맛이 약간 다르다. 갈 적(適)은 ‘누그러지다’라는 의미의 밑둥 적(啇)에 쉬엄쉬엄 걸을 착(辶)이 붙은 것으로서 길을 가다가 지치면 쉬엄쉬엄 간다는 의미, 또 응할 응(應)은 기러기 안(雁)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것이고, 북반부에서 겨울에 남쪽으로 이동하고 봄이면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는 철새 기러기는 무리 짓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바, 응(應)은 환경의 변화나 무리를 좇는 것을 말한다. ‘순응’이 변함없이 항상 옳은 자연의 이치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적응’은 자신의 호오(好惡)와는 관계없이 외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익숙해지려고 애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어로 말하자면 ‘순응’은 ‘adaptation’이고 ‘적응’은 ‘assimilation’이다. ‘adaptation’의 뿌리는 ‘적합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daptare’이고 ‘assimilation’은 ‘닮다’ ‘비슷하게 만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ssimulare’다. ‘순응’이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이라면 ‘적응’은 싫든 좋든 어찌할 수 없어서 따르는 것이라는 냄새를 풍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사회의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 사회 변화의 주체 또한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인간과 사회는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가지는 ‘프랙탈(fractal)’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fractal’은 폴란드 태생의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Benoit Mandelbrot)가 창안한 개념, 어원은 ‘조각 난’ ‘부분으로 부서진’을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fractus’로서, 자연물이나 수학적 분석 등에서 나타나는 규칙이나 질서를 말한다. 그 ‘프랙탈’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파악해보면 인간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변화하고, 그렇게 변화한 인간이 모여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한 사회에 인간은 또 다시 순응 또는 적응하는 바, 그 과정에서의 어느 정도의 부작용과 갈등은 불가피한 덤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다수 또는 힘 있는 세력이 사회변화를 초래할 경우 그런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순응’할 것인지, ‘적응’할 것인지, 또는 거부할 것인지를 놓고 고뇌하는 것을 본다. 

창작과비평사에서 1978년에 간행한 
정희성 두번째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맞다. 순응할 건가? 적응할 건가? 그게 문제다. 경상남도 창원 출신 시인 정희성(鄭喜成, 1945년- ) 또한 ‘순응’과 ‘적응’과 ‘거부’ 사이에서 무척 방황했던 듯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순응이 여의치 않자 적응이나마 하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제16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내는 등 한국사회의 소수의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을 주로 발표했던 그의 시작(詩作)에 대해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소위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프랙탈’의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군부독재 세력과 자본가들이 사회변화를 주도했던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에 순응 또는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했었다. 한국사회에 몸담고 있으므로 한국 사회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과 거부할 수 없는 억압 앞에서는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諦念)이 그의 작품의 기저를 이루고 있음이 확연히 감지된다. 

정희성이 1978년에 발표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도 순응과 적응 사이에서의 체념이 짙게 묻어난다. 그러나 결코 싸구려 체념은 아니다. 살필 체(諦), 생각 념(念), 생각을 살펴서 깨닫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체념과 닮았다. 자연의 이치를 상징하는 ‘흐르는 물’에 고단한 노동을 상징하는 ‘삽’을 씻고 슬픔도 내다버리는 행위에서는 세상 변화에 대한 순응의 의지가 읽혀지고, ‘샛강 바닥의 썩은 물’은 그 변화에 대한 순응 과정에서의 거부감의 배출로 보이며,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고독하고도 처절한 적응 의지가 확연히 감지된다. 이 작품이 사회참여 시의 한계를 벗어나 또 다른 일말의 감동을 덤으로 주는 것도 ‘삽’과 ‘샛강 바닥 썩은 물’과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을 모두 ‘흐르는 강물’로 정화하여 떠내려 보내는 체념과 달관(達觀)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휘 선택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나름대로 시적 카타르시스(katharsis)가 느껴진다는 말이다. 박정희 유신독재 말기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작품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어두워서 다 읽고 나면 뒤끝이 우울해지는 게 결정적인 흠이라면 흠. 그래서, 덜 다듬어진 것 같아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