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캠브릿지와 알스턴 사이를 흐르는 찰스 리버 사이드. 가을색이 완연하다. 낙엽을 밟으며 걸을 때마다 릴케의 시 '가을날'을 다시 읇조려 본다. |
Herbsttag(가을날)
Herr①: es ist Zeit.② Der Sommer war sehr groß.③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
Befiel den letzten Früchten voll zu sein;
gib ihnen noch zwei südlichere Tage,
drä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jage
die letzte Süß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④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⑤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ätter treiben.
주여①, 가을이 왔습니다.②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③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④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 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년-1926년>
때가 왔다. 무슨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하여 심판하는 때’를 떠올리겠지만 천만의 말씀, 가을이 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23.5˚나 삐딱하게 기울어진 지구 땅덩어리가 태양 주위를 돌기 시작한 이래 “태양의 황경이 180˚를 넘어서면서 태양이 적도를 통과하여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들어가는 때”를 ‘가을’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거창한 의미를 가지기에 ‘때가 왔다’고 호들갑을 떠느냐고? 태양으로부터 약 1억 5000만㎞ 떨어진 지구에서 바라보는 태양의 궤적이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넘어가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북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낮과 밤의 기온차 또한 크게 벌어지고 과실이 무르익고 식물의 생장이 휴면기에 들어가기에 자고이래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을’을 뜻하는 영어 ‘autumn’의 뿌리도 라틴어 ‘autumnus’로서 ‘수확(收穫)’을 뜻하기도 한다. 미국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영어 ‘fall’은 양분의 공급이 중단된 잎들이나 과실이 ‘떨어지다’라는 의미다. 그래서 ‘가을’이 ‘인생의 수확기’ ‘내리막길’ ‘후반부’ 등을 비유하는 데 쓰여 왔다는 건 가방 끈 짧은 사람들도 다 아는 상식에 속한다.
맞다. 꼭 이맘 때 쯤이었으리라,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년-1926년)가 ‘가을날(Herbsttag)’을 쓴 것도. 그 ‘가을날’ 첫머리가 ‘Herr①’ 즉 ‘주(主)’로 시작하기에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구하고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역사 유구하고 인류 보편적이라는 증거가 또 하나 나타났다고 반색하겠지만 그 또한 만만의 말씀, 여기서의 ‘주’는 기독교의 신을 특정한 게 아니라 ‘대자연’ 또는 그것을 신격화한 ‘조물주(造物主)’로 해석하는 게 옳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느냐고? 그 작품을 쓸 무렵의 릴케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 등에 심취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인생관과 세계관에 반발하여 과학적 이성적 태도를 취했었다는 사실을 까먹어서는 안 된다.
‘가을날’ 첫 번째 행의 ‘groß’도 이 작품이 종교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③? 무슨 자다가 일어나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서양문화=기독교 문화’라고 수박의 겉만 핥아온 한반도 사람들은 하느님과 예수를 의식하여 ‘groß’를 ‘위대하다’라는 의미로만 해석해왔지만, 기실 ‘groß’는 ‘great’ 뿐만 아니라 ‘big’ ‘magnificent’ 등의 의미도 지니는 바, 이 작품에서는 ‘굉장하다’라는 의미로 풀이해야 문맥이 통한다. 술 퍼마시고 중언부언하지 않는 한 여름을 위대하다고 칭찬해놓고 가을을 노래할 시인은 없을 테니까. 찌는 듯한 무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고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소나기에 오장육부가 젖고 파리와 모기가 평화를 물어뜯던 여름은 참 지긋지긋했었으나, 그로 인해 만물이 생장하기에 차마 투덜거릴 수가 없어서, ‘참 굉장했었다’라는 반어법(反語法)을 사용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es ist Zeit.’②를 ‘가을이 왔다’고 번역한 것도 엉터리 중의 엉터리, 영어로 바꾸면 ‘It's Time’으로서, 예수가 재림하여 심판해주기를 고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상용 어구를 풍자하여 ‘드디어 때가 됐다(왔다)’고 너스레를 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해 “신의 은총 속에서 영혼의 완숙을 갈망하는 기도조의 작품”이라고 떠벌이는 것이야말로 코미디의 클라이막스, 이 작품의 주제는 니체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이빨이 흔들리도록 곱씹었던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不安)과 고독(孤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④’라는 셋째 연 첫 행에 함축돼 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 즉 실존으로서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인간’을 의미하며,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는 불안과 고독을 인간이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어줍잖게 종교 따위에 귀의하지는 않겠다는 실존 선언이며, 그 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쓰겠다⑤’는 것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을 앞두고 가을바람이 나뭇잎들을 떨어뜨려 이리저리 몰고 다닐 때 그 나뭇잎들과 함께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면, 그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실존선언이야말로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조물주에 대한 가장 치열한 반항이 아닌가?!
1900년경의 릴케 |
자, 어쨌거나 이제 때가 됐다. 아직은 따사로운 햇살이 ‘마지막 과실’들을 완성시킴으로써 포도주의 단맛이 더 한층 깊어지겠지만, 머잖아 나뭇잎들이 하나 둘 떨어지고, 창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런 가을밤이 더욱 더 길어지면서, 이제 집짓기를 포기한 사람이 잠자지 않고, 읽고 , 그리고 긴 편지를 써야할 때가 왔다. 더러는 해질 무렵 거리의 낙엽이 되어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삶이 뭔지, 사는 게 왜 이다지도 쓸쓸한지, 피할 수 없는 불안과 고독이라면 어찌 부둥켜안아야 하는 건지를 곱씹고 또 곱씹으리라. 기억도 가물가물한 학창시절에 처음 읽었던 릴케의 ‘가을날’을 다시금 해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