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illusionment of Ten O'clock (10시 정각의 환멸)
The houses are haunted 그 집들은 홀려 있어
By white night-gowns. 흰색 잠옷들에 의해.
None are green, 어떤 것도 초록색이 아니네.
Or purple with green rings, 초록색 링이 달린 자주색도
Or green with yellow rings, 노란색 링이 달린 초록색도
Or yellow with blue rings. 파란색 링이 달린 노란색도 아니야.
None of them are strange, 그 어느 것도 낯설지 않아,
With socks of lace 레이스 양말이나
And beaded ceintures. 구슬 꿴 허리띠를 곁들여도.
People are not going 사람들은 꿈꾸지 않을 거야
To dream of baboons and periwinkles. 비비(狒狒)와 고둥을.
Only, here and there, an old sailor, 단지, 여기저기, 한 늙은 뱃사람,
Drunk and asleep in his boots, 술에 취해 장화 신은 채 잠들어
Catches Tigers 호랑이를 잡는구나,
In red weather. 붉은 날씨 속에서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년-1955년>
신이 태초(太初)에 천지를 창조한 후 “빛이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빛이 있었다? 종교적 믿음과는 상관없이 태초에 빛이 있었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 인간 눈의 안쪽은 망막으로 덮여 있고 망막에는 원추세포(圓錐細胞)와 간상세포(杆狀細胞)가 있어 빛을 감지하는데, 그 빛이 신경절 세포를 통해 뇌로 전달되어 색과 모양 등이 판별되는 바, 모태에서 나온 인간이 두 눈을 뜨고 최초로 빛을 보는 그 순간이야말로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태초’일 테니까. 그런데 그 빛 속에 색(色)이 있었다는 것 또한 까먹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프리즘으로 가시광선(可視光線)을 분광하면 보라, 남, 파랑, 초록, 노랑, 주황, 빨강이 나타난다. 사물이 제각각의 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사물마다 반사하는 색이 다르기 때문, 그 색의 인식 또한 각자의 유전자에 따라 제각각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포착하고 자신의 뇌로 인식하는 색만 본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빛이 절대적인 신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색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것, ‘색(色)’이라는 말의 뿌리도 절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자 ‘색(色)’은 사람 인(人)과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은 모양의 절(㔾)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 무릎을 꿇고 앉는다는 것은 뭔가를 기구(祈求)하거나 처분을 기다리거나 또는 용서를 빌 때 취하는 자세였던 바, 그 때의 얼굴색이 마음을 표현한다고 해서 ‘안색’ 또는 ‘빛깔’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영어 ‘color’의 조어(造語) 과정도 ‘색(色)’과 유사하다. ‘color’의 뿌리는 ‘감춤’을 뜻하는 고대 라틴어 ‘colos’로서, 거기서 ‘얼굴색’ ‘피부색’을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 ‘color’가 나왔고, 그게 13세기 경 영어권으로 넘어왔다. 얼굴색은 흥분하면 붉어지고 공포에 질리면 하얗게 변하고 근심걱정에 휩싸이면 어두워지기에 적(赤) 백(白) 흑(黑) 따위의 색깔까지 통칭하게 됐지만, 색은 본디 마음의 표출이므로,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행간도 읽혀진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금과옥조로 삼는 불교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가르친 게 아닌가 싶다. 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그 말의 원문은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인 바, 느낌과 생각하고 아는 것을 행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그것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인연으로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이므로 집착하지 말라는 충고로 받아들여진다.
맞다.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만을 본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일체유심조다. 그런 색즉시공의 관점에서 본다면 20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의 이미지스트(imagist)들이 주도했던 모더니즘(modernism) 시 운동 또한 시인 자신이 본 색(色)을 중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존하는 낭만주의(浪漫主義)나 자신의 주관성보다는 사상(事象)의 객관성만 강조하는 사실주의(寫實主義)에 반발하여 자신의 눈으로 포착한 이미지(image)를 주요 도구로 삼았다. 심상(心象)이라고 번역되는 ‘image’는 말 그대로 뭔가를 보거나 생각할 때 마음에 그려지는 그림, 불교에서 말하는 색(色)과 딱 맞아떨어진다.
월러스 스티븐스 시선집 |
유력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스티븐스는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하고 뉴욕대 로스쿨을 졸업하여 변호사가 된 후 로펌을 거쳐 코네티컷 하트포드 소재 재해보험사 부사장까지 역임하면서도 1955년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사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인과 비즈니스맨으로 성공한 인물로 꼽힌다.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교수직 제의를 받았으나 보험사 부사장 자리가 더 좋다고 사양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 만큼 그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반증이겠지만 자신이 목표한 것은 꼭 이루고야 마는 집념 또한 남달랐던 것 같다. 스티븐스가 1909년 수년 동안 사귀던 엘지 비올라 케이츨(Elsie Viola Kachel)과 결혼할 때 스티븐스의 부모가 가난한 집안 출신 딸이라고 반대하자 가족들 없이 결혼식을 올린 후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한 번도 방문하거나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스티븐스 부부가 뉴욕에서 조각가 아돌프 와인먼(Adolph Alexander Weinman)의 아파트에 세 들어 살 때 와인먼이 엘지를 모델로 삼아 흉상을 제작한 바 있는데, 훗날 와인먼이 10센트짜리 주화 ‘머큐리 다임(Mercury dime)’ 디자인 용역을 맡았을 때 그 흉상의 옆모습을 사용함으로써 주변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티븐스는 엘지가 우울증과 정신병을 앓아 결혼생활이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나 끝까지 이혼을 하지 않은 순정파, 인생 자체가 미몽이고 환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기에, 시작(詩作)을 통해 실재와 상상과 믿음의 ‘색즉시공’을 분석해보고 깨달은 바가 컸기에, 자신의 인생만큼은 누가 봐도 변하지 않는 고집과 순정으로 일관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