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고풍의상(古風衣裳)-시적 감동 없는 ‘옛것 사랑’

18,9세기에 활동했던 화가 신윤복의 '미인도'(사진 오른쪽)와 1930년대  기생들의 모습.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고풍의상(古風衣裳)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회장을 받친 회장저고리
회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문장’(1939),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연과 환경에 도전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게 편했던 농경정착문화권에서는 옛것 즉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대의 경험과 습관과 지식을 중시했었다. 그런 것들 가운데 줄기를 삼을만한 것들을 간추려 전통(傳統)이라고도 했다. 농경정착문화권의 ‘선생님’으로 불리는 공자(孔子) 또한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고 역설했었다. 옛 것을 배우고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됨직하다는 것이었다. 

‘옛것(故)’이라는 게 뭔가? 한자 ‘故’는 옛날을 뜻하는 고(古)와 글월이나 ‘회초리로 치다’를 뜻하는 등글월문(攵=攴)이 합쳐진 것, 옛날로부터 전해오는 관습이나 전통 등 글월로 기록해둘 만한 가치 있는 ‘옛것’을 말한다. 흔히 옛 고(古, 故)를 영어 ‘old’와 같은 의미로 간주하지만 천만의 말씀, 영어 ‘old’의 뿌리는 ‘성인’ ‘다 큰 사람’을 뜻하는 고대 게르만어 ‘alt’가 영어권으로 넘어와서 변한 ‘ald’로서 ‘(현재의 시점을 기준으로 봤을 때)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묵었다(성장했다)’라는 말맛을 풍긴다. 한자로 말하자면 구(舊)에 가깝다. 예를 들면 ‘old house’는 ‘지금은 없는 옛날 집’이 아니라 ‘현존하지만 오래 되어 낡은 집’을 뜻한다. 

수 천 년 동안 공자 말씀을 귀 따갑게 듣고 살아온 탓인지 한국인들은 옛것을 무척이나 중시하는 척 한다. 말 그대로 ‘말로만’이다. 컴퓨터 하나로 지구촌을 들여다보는 요즘에도 한국적 전통을 비판하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미화하면서, 시대에 맞지 않는 습관이나 생활양식을 개선하기 보다는 이중적 태도의 관성 속에서 안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삶의 기본인 의식주(衣食住)만 봐도 그렇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선호하면서도 기와집이나 초가(草家)를 예찬하고, 설렁탕이나 비빔밥보다는 일식이나 양식을 고급으로 간주하면서도 ‘한식의 국제화’를 외치는가 하면, “이 지구상에 한복처럼 아름다운 의상은 없다”고 침을 튀기는 사람들도 누군가 치마저고리 입고 사무실에 출근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자꾸만 위아래를 훑는 것을 본다.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청록집'과 시인 조지훈의 만년의 모습
경북 영양(英陽) 출신으로 1946년 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과 함께 자연 친화적인 시들을 모은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했다고 해서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시인 조지훈(趙芝薰:1920~1968,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 1939년 ‘문장(文章)’에 발표한 데뷔작 ‘고풍의상(古風衣裳)’도 ‘말로만 옛것 사랑’인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가 없다. 한국현대시문학사에서 과대평가된 작품들 중의 하나, 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 조지훈의 나이는 열아홉, 채 스물이 안 된 문학청년의 작품 치고는 발군의 세련미가 돋보인다고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중고교 국어시간에 가르칠만한 고전으로 대접할 일은 아닌 듯싶다. 한국현대문학사 초창기에 ‘청록파’라는 기념비를 세우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하면서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긴 그의 문학적·학문적 성과를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관찰자의 느낌과 서술만 있을 뿐 즉 주체(작품 속의 화자)와 객체(고풍의상) 사이의 교감이 없어 시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적 감동이 차단되어 있거니와,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아닌 소재의 주관적인 묘사에만 치중함으로써 시공(時空)을 초월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 민속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같은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한복을 할머니 할아버지 옷으로나 간주하는 요즘의 신세대 독자들에게는 공감 불가능한 ‘온고이지신’, 한옥 헐고 아파트 짓는 요즘 쫄쫄이 청바지에 쫄티 즐겨 입는 21세기 젊은이들에게 회장저고리나 열두 폭 치마나 운혜(雲鞋) 당혜(唐鞋)를 권할 수도 없거니와, 한국의 전통미가 어쩌고저쩌고 강제 주입시킨 후 이 작품을 백 번 천 번을 외우게 해봤자 시적 감동이 전해질 리는 만무, 시문학 교실의 학생이 아닌 전통의상박물관의 관람객에게나 들려주면 적합할 듯싶다. 

일본 제국주의의 서슬 퍼런 억압 아래서 감히 식민지 조선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조지훈의 민족정신과 패기는 칭찬해주고 싶지만 문학성만을 놓고 볼 때 ‘고풍의상’은 한국의 전통미를 예찬하기 위한 목적성을 가지고 쓴 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그 목적성이 과녁을 크게 벗어났다. 시의 목적성은 단 하나, 음식은 맛으로 먹고 옷은 멋으로 입듯이, 감동으로 읽혀야 한다. 시를 쓸 ‘당시의 의도’만 있을 뿐 그 시를 읽는 ‘현재의 감동’이 없으면 그 때 그 시절의 선전선동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 즉 시적 감동을 염두에 두고 창작되어야 오랜 세월을 두고 읽혀진다는 것을 시를 짓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2019년 12월 11일 수요일

長安有男兒 二十心已朽 - 염세주의 청춘의 한탄

뉴욕 퀸즈 플러싱 개천변 풍경.

증진상(贈陳商; 진상에게 주다)

長安有男兒 二十心已朽 (장안유남아 이십심이후) 
장안에 한 남자 있어, 나이 이십에 몸과 마음이 푹 썩어버렸네

楞伽堆案前 楚辭繫肘後 (능가퇴안전 초사계주후) 
능가경이 책상 앞에 쌓이고 초사가 팔꿈치 끌어당기네

人生有窮拙 日暮聊飮酒 (인생유궁졸 일모료음주)
사는 게 곤궁하고 쓸모없어서 해 지면 술잔이나 기울이네

只今道已塞 何必須白首 (지금도이색 하필수백수)
지금 길이 막혔거늘 어찌 백발이 될 때까지 기다리리 

凄凄陳述聖 披褐鉏俎豆 (처처진술성 피갈서조두)
처량하고 처량하구나 진술성이여, 베옷 걸치고 호미질하고 제사나 지내고 있다네

學爲堯舜文 時人責衰偶 (학위요순문 시인책쇠우)
배움이 요순의 문장에 이르러도 세상 사람들은 쇠약하다고 꾸짖네 

柴門車轍凍 日下楡影瘦 (시문거철동 일하유영수)
사립문에 수레바퀴 자국 얼어붙고 해질 녘 느릅나무 그림자 수척한데

黃昏訪我來 苦節靑陽皺 (황혼방아래 고절청양추)
황혼이 나를 찾아와 절조 힘들게 지키려니 푸른 햇살마저 주름지네

太華五千仞 劈地抽森秀 (태화오천인 벽지추삼수)
태화산은 오천 길이나 되어 땅을 갈라 나무들을 빼어나게 키워내고

旁古無寸尋 一上戛牛斗 (방고무촌심 일상알우두)
주변에 겨룰만한 게 없어서 한 번 솟아 견우성과 북두성을 찌르는데

公卿縱不怜 寧能鎖吾口 (공경종불령 영능쇄오구)
높으신 분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더라도 어찌 내 입까지 막으랴

李生師太華 大坐看白晝 (이생사태화 대좌간백주)
나도 태화산을 스승 삼고 크게 앉아 밝은 낮을 바라봤건만

逢霜作樸樕 得氣爲春柳 (봉상작박속 득기위춘류)
서리를 만나면 잡목이 되지만 기를 얻으면 봄버들이 된다더니

禮節乃相去 顦顇如芻狗 (예절내상거 초췌여추구)
예와 절이 서로 떠나가니 초췌하기가 풀강아지 같네 

風雪直齋壇 墨組貫銅綬 (풍설직재단 묵조관동수) 
풍설로 재단 바로 잡고 검은 끈으로 동수 꿰차려 했지만 

臣妾氣態間 唯欲承箕帚 (신첩기태간 유욕승기추) 
계집 같은 기세와 자태로 키질과 빗자루 질이나 하고 있으니

天眼何時開 古劍庸一吼 (천안하시개 고검용일후)
하늘 눈이 언제 열려 옛 검 휘두르며 큰소리 쳐보나 

                                                             <이하(李賀); 790~816>

세주의(厭世主義, pessimism)는 세상이 불합리하고 비애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 한자 싫어할 염(厭)은 지붕이나 너럭바위 아래의 막힌 공간을 그린 엄(厂) 속에 ‘물리다’ ‘싫어하다’라는 의미의 염(猒)자가 들어있는 형상으로서 답답한 가운데서 물리고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주관적이다. 반면 영어 ‘pessimism’의 뿌리는 ‘최악’을 뜻하는 라틴어 ‘pessimus’로서 ‘pessimism’, 보는 이가 ‘worst’를 보느냐 ‘best’를 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행간이 읽혀진다. 객관적이다.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자신의 느낌에 따라 사물이나 세계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한자문화권 사람들과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사물이나 세계가 달라 보인다고 믿는 영어문화권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느껴진다. 

     이하의 초상(출처-中文百科)
살아온 과거보다 살아갈 미래가 더 많은 사람들을 ‘청춘(靑春)’이라고 한다. 요즘 청춘은 젊은이를 뜻하는 말로 변해버렸지만 원래는 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대 중국의 오행(五行)으로 풀이하면 봄은 파란 청(靑), 여름은 붉을 적(赤), 가을은 흰 백(白), 겨울은 검을 현(玄)에 해당하는바, 그래서 인생을 청춘(靑春)·주하(朱夏)·백추(白秋)·현동(玄冬)이라는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했었다. 봄날의 청춘은 앞날이 창창하여 뭔가 잘못돼도 그걸 바로 잡을 가능성이 크기에 쉽게 절망하지 않고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뭔가로 인해 절망하여 염세주의에 푹 빠져 있다면? 봄날의 꽃가지가 꽃봉오리를 맺기도 전에 시드는 꼴, 그 꼴이 되었으니 오죽하겠느냐는 동정과 연민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자고이래 그런 동정과 연민을 시로 읊은 시인들이 수두룩했었다. ‘귀재절(鬼才絶)’이라고도 불렸던 중국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 790년~816년)도 앞길이 콱 막힌 나머지 염세주의에 푹 절여진 청춘이었다. 그가 낙백하여 술로 울분을 달래던 시절에 쓴 것으로 보이는 ‘진상(陳商: ?-855))에게 주다(贈陳商)’를 보면 삶에 대한 의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이 이십에 마음이 이미 썩어서(二十心已朽), 세상만사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는 불가의 능가경(楞伽經)이나 탐독하고(楞伽堆案前), 중앙 정계에서 쫓겨나자 세상 원망하다가 돌덩이를 껴안고 멱라(汨羅)에 몸을 던진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초사(楚辭)’나 읊조리고 있음을 본다.

어떤 사람들은 이하가 뛰어난 문재(文才)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인정받지 못한 진상을 동정하여 이 시를 썼다고 주장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지 않나 싶다. 이하는 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2년 즉 서기 807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낙양(洛陽)으로 올라왔으나 부친의 이름 ‘진숙(晉肅)’의 ‘진(晉)’과 진사(進士)의 ‘진(進)’이 같은 발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응시기회를 박탈당해 낙향했고, 808년 겨울 장안(長安)으로 가서 벼슬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겨우 음서제(蔭敍制)로 종9품 봉례(奉禮) 자리를 얻어 제사 심부름이나 하다가, 813년 봄 “봉례 말직에서 더 무엇을 기대하랴”라고 탄식하면서 낙향했었다. 그러다가 장안 시절의 친구 장철(張徹)에게 도움을 청하여 관직을 구하고자 노주(潞州, 지금의 산서성 장치현)로 향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귀향했고 이후 우울증으로 인한 병을 얻어 817년 숨을 거두고 만다. 향년 27세였다. 반면 출생연도가 미상이지만 이하의 후배로 보이는 진상은 원화 9년 즉 814년 과거에 급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와 예부시랑(禮部侍郎)을 거처 비서감(秘書監)을 역임하면서 문집 7권을 남기고 또 824년에서 826년까지 재위했던 경종(敬宗)의 실록(實錄) 10권을 편찬하기도 했었다. 이 시는 이하가 봉례랑에 임명되던 스무 살 시절 즉 809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바, 당시에는 진상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이었으므로 뜻을 펴지 못하는 진상을 동정했다기보다는 이하 자신의 신세 한탄으로 보는 게 옳거니와, 그러므로 “凄凄陳述聖 披褐鉏俎豆(처처진술성 피갈서조두)”라는 구절도 진술성이 처량하다는 게 아니라 “진술성(‘술성’은 진상의 자)이여, (내 신세가) 처량하고 처량하구나, (봉례랑이 되어) 베옷 걸치고 호미질하고 제사나 지내고 있다네”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재주를 인정받지 못해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는 선배가 전도유망한 후배를 붙잡고 늘어놓은 술주정쯤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이하의 시작(詩作)에 귀신이나 죽음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염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나 거꾸로 보면 염세주의 덕분에 이하가 ‘귀재절’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실소가 머금어지기도 한다. 자고로 희망보다는 절망, 기쁨보다는 슬픔, 낙천주의보다는 염세주의가 시를 두께를 두껍게 하고 깊이를 깊게 해왔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이하의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널리 읽혀지는 게 그 만큼 많은 청춘들이 염세주의에 빠져 이하와 공감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만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2019년 12월 7일 토요일

추일 서정(秋日抒情)-시인의 눈으로 본 색(色)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의 토룬 시가지 풍경을 담은 우편엽서. 코페르니쿠스 생가 등 중세 유적이 잘 보존돼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추일 서정(秋日抒情)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1940.7, 인문평론, 김광균(金光均): 1914년 1월 19일~1993년 11월 23일> 


자 눈 목(目)은 눈의 생김새를 본뜬 것, 눈을 뜨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이든 아니든 뭔가가 보인다. 그걸 '견(見)'이라고 했다. 그 '견'을 좀 더 자세히 구분하기 위해 보고자 하는 것을 보는 것을 볼 시(視)라고 했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나타날 현(現)이라고 했다. 시(視)는 신의 강림이나 뭔가를 희구하여 제사를 지낼 때의 제단을 본뜬 시(示)와 볼 견(見)이 합쳐진 것이고 현(現)은 빛을 발하는 구슬 옥(玉)과 볼 견(見)이 합쳐진 것, 시(視)의 주체는 뭔가 보고자 하는 아(我)이고 현(現)의 주체는 나의 눈에 보이는 비아(非我), 영어로 말하자면 시(視)는 'see'이고 현(現)은 'appear'다. 'see'의 뿌리는 'to see, look, behold; observe, perceive' 등의 의미를 지닌 고대영어 'seon'이고 'seon'의뿌리는 'to follow'의 의미를 지닌 인도 유럽어의 접두사 'sekw- '로서 나의 눈이 나의 의지대로 뭔가를 따라가면서(to follow) 보는 것을 말하는 반면 'appear'의 뿌리는 '앞으로 나오다'(to come forth)라는 의미의 라틴어 'apparere'로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뭔가를 볼 때 눈으로 보는 건가? 자신의 뇌에 이미 입력돼 있는 정보로 해석하는 건가? 각막을 통해 들어온 빛은 수정체에서 굴절돼 유리체를 통과해서 망막에 상이 맺히고 시신경을 통해 대뇌피질(大腦皮質)의 후두엽(後頭葉)에 전달된다. 후두엽에는 시각연합영역과 일차시각피질이라고 하는 시각중추가 있어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바,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각피질에 도착하면 사물 모양 등을 분석한 후, 그 결과를 이미 뇌에 입력돼 있는 정보 즉 개개인의 지식과 경험 등으로 해석한다. 여기에 장애가 생기면 눈의 다른 부위에 이상이 없더라도 볼 수 없게 되고 후두엽에서 발작이 일어나면 환시(幻視, Visual hallucication)가 유발되기도 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지만 그 일견(一見)이 개개인의 뇌에 입력돼 있는 정보에 따라 제각각으로 해석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우스개 속담이 생겨난 것도 그와 무관치 않거니와,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영어 속담도 뭔가를 본다는 것은 본 것에 대한 뇌의 해석에 지나지 않고 그게 믿음으로 굳어진다는 의미로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런 믿음 즉 주관적인 관찰(觀察)에 의해 얻어진 개념을 ‘관념(觀念)’이라고 한다. 한자 볼 관(觀)은 황새 관(雚)에 볼 견(見)이 붙어 만들어진 것이고 생각 념(念)은 이제 금(今)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것으로서 지금 머릿속에 떠올려진 생각을 말한다. 

1936년 창간된 문예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거점으로 삼아 “시는 하나의 회화”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시각적인 시들를 발표했다는 시인 김광균(金光均: 1914년 1월 19일~1993년 11월 23일)은 꽤나 관념적이었던 것 같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 게 아니라 관념과 상상력의 안경을 통해 봤다. 그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로 꼽히는 '추일서정(秋日抒情)' 또한 그 점을 잘 말해준다. '낙엽'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후 소련의 점령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이 멸망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을 떠돌아야 했던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에 비유한 것은 쓸쓸한 가을날 길 위에 나뒹구는 낙엽의 이미지를 그려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덮어줄 수 있지만, 그걸 보고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떠올린 것은 김광균 혼자만의 상상이어서 실소가 머금어진다. '도룬'은 폴란드 중부에 위치한 도시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의 일본어 발음을 한글로 옮긴 것으로서,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큰 공습이나 포격을 당하지 않아 르네상스 시기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생가 등 중세유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된 도시들 중의 하나, 1939년 9월 큰 저항없이 토룬을 점령한 나치 독일은 그곳이 한 때 프러시아의 영토였던 점을 들어 독일 영토로 병합한 후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과 폴란드인들을 대거 추방하거나 학살하고는 포로수용소로 사용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룬에서 독일군과 폴란드군과의 공방이 치열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흰 이빨을 드러낸 공장의 지붕'과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을 등장시켜 자신이 의도하는 황량한 그림을 그리고 있음에 이 시를 발표할 당시 26세 일본 식민지 청년의 뇌속에 입력된 정보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이 시를 읽은 독자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룬'이라는 도시를 알고 있었는지도 의문, '추일서정'이라는 제목이 없었더라면 이 시의 내용을 개인의 주관적 서정이 아닌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였을 터, 가공의 소재로 그럴싸한 그림을 그린 김광균의 환시에 속아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추일서정'이 실려 있는  김광균의 
두번째 시집 '기항지'(1947년, 정음사)
기실 김광균 작품세계의 진짜 매력은 '환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감성으로 머릿속에 그린 혼자만의 그림을 이미지의 조합으로 그대로 재현하는 재주가 탁월하여. “회화적 이미지에 도회적 감각과 낭만적 서정성을 가미한 독특한 시풍”을 구축했다는 평가에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김광균의 시작(詩作)에 주지주의니 모더니즘(Modernism)이니 하는 칭찬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데 대해서까지는 동의할 수가 없다. 흔히 김광균에 대해 “T.E.흄, E.파운드, T.S.엘리어트 등 영미 이미지즘 시운동을 도입 소개한 김기림(金起林)의 이론과 시작에 영향을 받아 주지적 모더니즘의 시론을 실천했다”고 주장하지만 꼼꼼이 살펴보면 결이 확실히 다르다. 현대 문명에 비판적이고 이미지를 선호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흄이나 파운드 등이 자신의 의지나 감정보다는 지성과 객관을 중시하여 '정서(sentiment)'를 배제한 채 순간의 이미지 포착에 주력했던 반면 김광균은 자신의 정서를 여과없이 드러내 큰 차이를 보이거니와, 영미 시단의 이미지스트들이 사물의 '현(現)'을 그대로 그려냈다면 김광균은 사물을 '시(視)'하여 자신의 뇌에 입력된 정보로 해석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김광균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리움, 비애 등의 감상과 연결된 현란한 수식어들이다. 이러한 수식어들이 만드는 시각적 이미지들은 결국 산뜻한 눈요기로서의 풍경만을 연출할 뿐, 내면의 구체적 경험과 연결된 감동의 세계에 연결되지는 못한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눈으로 보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은 다르다. 이 사람이 본 것과 저 사람이 본 것도 다르다. 불교 용어를 빌리자면 눈을 통해 들어는 모든 것은 색(色), 그 색은 개개인의 뇌 속에 입력된 정보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바, 그 변화의 공통분모를 찾아내 공감을 유도하는 게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걸 얼마나 크게 찾아내는가에 따라 많이 읽혀지고 덜 읽혀진다는 것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 고교 시절 국어시간에 읽던 '추일서정'과 세상살이 어느 정도 경험한 지금 다시 읽어보는 '추일서정'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그게 색이기 때문이 아닌가?! 

2019년 11월 30일 토요일

목포의 눈물-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1930년대 목포 시가지 전경. 멀리 삼학도가 보인다.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찧타 옛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1935년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 이난영(李蘭影) 노래> 


반도 사람 치고 목포(木浦)가 항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없을 것 같은데...'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가 있다? 그렇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는 '뽕짝'이다? 그것도 그렇다. '뽕짝' 하면 한국인들은 6,70년대의 이미자나 남진 나훈아를 떠올리지만 기실은 일본인들이 고유의 민속음악에 미국서 유행하던 리듬 '폭스 트롯트(Fox Trot)'를 접목시킨 '엔카[演歌]'라는 게 정설, 영어 발음이 서투른데다가 'ㅌ' 발음을 잘 못하는 일본인들이 '도롯도'라고 하던 것을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열등감으로 일본과 관련된 것이면 뭐든지 눈을 흘기는 한국인들이 뽕짝 뽕짝 뽕짜작 뽕짝 2/4 박자 또는 4/4박자를 의성(擬聲)하여 '뽕짝'이라고 비하했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겉으론 일본을 미워하면서도 일본에 의해 근대화된 탓에 일본 것 빼고나면 남는 게 별로 없어 일식집서 '사시미'와 '사케' 즐기면서 시름을 달래던 6,70년대 한국인들의 자가당착(自家撞着) 자조(自嘲)라고나 할까, 줄여 말하자면 '뽕짝'은 한일 양국의 과거와 현재를 적나라하게 까발려주는 단어들 중의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목포'라는 항구만해도 그렇다. 일찍이 그 이름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다지만 제대로된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97년 10월 일본에 의해 개항된 이후 부터라는 것을 여태껏 일본인들을 '쪽바리'라고 부르는 한국인들도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4분의 2박자, 라단조, 약간 빠른 빠르기의 '목포의 눈물'은 예사 '뽕짝'과는 다르다. 1930년대 한반도 사회를 함축한 한편의 시(詩)다. 일제 총독부가 조선인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문화정책을 펴던 1935년 초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주최한 제1회 ‘전국 6대 도시의 향토찬가’ 공모전에 무명 시인 청년 문일석(文一石)이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 당선됐고,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어서 일본서 음악을 공부한 작곡가 손목인(孫牧人)의 곡을 붙였고, 그걸 목포 출신의 십대 후반 신인 가수 이난영(李蘭影)에게 부르게 해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목포 출신 청년이 그려낸 목포의 정서를 목포 출신의 여가수가 불렀다고 해서 목포 사람들은 '1980년 5·18로 희생당한 전라도의 애국가'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니 '해태 타이거스의 응원가'니 뭐니 유달산 중턱에 노래비를 세워놓을 정도로 기리고 있지만 민족주의나 향토색 걷어내고 보면 목포 사람들은 물론 그 시대 한반도 사람들과 일본인들의 감성을 함께 아우른 명작으로 보는 게 옳을 듯 싶다. 혹자는 2절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를 임진왜란 때 왜적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과 곧바로 연결시켜 민족적 열등감을 삭히기도 하지만, 노래 자체가 일본풍 '뽕짝'이어서 일본인들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1914년 대전-목포간 호남선 철도를 개통하는 등 보잘 것 없던 포구 목포를 당시 인구 6만의 조선 6대 도시의 하나로까지 키웠던 일본인들이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피압박 조선 사람들의 정한 표출을 적당히 눈감아 주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 못했을 터, '목포의 눈물'을 목포에만 묶어두는 데에는 고개가 좌우로 흔들어진다. 시가 시인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것이듯, '목포의 눈물' 또한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은 음반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이 불운하여 49세에 세상을 뜬 이난영이나 서슬 퍼렇던 일제 강점기 군국주의 미화 가요를 작곡하여 '친일 부역자'로 낙인 찍힌 손목인의 것이 아니라 어느 때 어디서라도 호젓하게 즐겨 부르는 사람들의 것이 아닐까. '목포의 눈물'이 유행의 파도 깊이 숨어들어 잊혀지는 여타 유행가와는 달리 지금껏 애창되고 있는 것도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 '뽕짝'의 차원을 훌쩍 넘어섰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해방 후 발매된 이난영의 히트곡 모음 음반.
'목포의 눈물'은 여럿이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로 부르기보다는 혼자서 술 한잔 홀짝이면서 시로 읽는 게 더 가슴에 와닿는다. 그 시를 지었다는 문일석도 예사 인물이 아니었던 듯 싶다. 와세다 대학 유학생으로서 본명이 '윤재희'였고 일제 징용을 피해 돌아다니다가 병을 얻어 1944년 2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는 미확인 전설(?)은 차치하더라도, '목포의 눈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와 일본에서 울려퍼졌건만 “내가 바로 문일석”이라고 자랑한 사람은 커녕 그 가족 조차 나타나지 않은 '그럴만한 이유'도 궁금하거니와, 한반도에서 현대시가 겨우 모양을 갖춰가던 그 시절에 무명 문학청년이 당대 어느 유명 시인도 함부로 흉내내지 못할 공감각적(共感覺的) 대구(對句)들을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엮어냈다는 게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구절구절 다시 음미해보자. 사공의 뱃노래가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가운데 깊은 밤 흘러가는 조각달이 옛상처를 새록새록 떠올리게 한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이라는 회한의 탄식이 어찌 절로 터져나오지 않겠는가! 감상적 이미지의 단어들을 적당히 나열해놓고 시라고 우기던 그 때 그 시절의 시작(詩作)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칭찬이 아깝지 않다. 

노래는 세월 따라, 세월은 노래 따라? 해방 전 10대 후반의 신인 이난영이 특유의 비음(鼻音)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으로 '목포의 눈물'을 불러 일본서 들여온 축음기를 돌리고 또 돌린 데 이어 해방 후 먹고 살만해진 일본인들이 한반도 식민지 시절의 향수에다 기생관광을 덤으로 얹어 즐기던 1970년대 이난영의 아들뻘 가수 조용필이 특유의 쉰소리와 흐느끼는 듯한 창법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가라오케 술집의 마이크를 적시고 또 적신 게 우연인가? 한국과 일본 양국이 일제하 징용 및 위안부 배상문제를 놓고 수출규제가 어쩌고 지소미아(GSOMIA-1945년 광복 이후 한·일 양국이 맺은 유일한 군사협정) 파기가 저쩌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가운데 목포 출신 판소리 명창 박금희로부터 수궁가 춘향가를 사사받으면서 목청을 틔웠다는 이난영 손녀뻘 가수 송가인이 조선일보 계열사 TV조선 주최 '내일은 미스트롯' 경연에서 `우승하여 스타덤에 올랐다? 한 세기 전 목포 앞바다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들었던 '목포의 눈물'이 국가간 체면과 이익의 충돌이 불꽃 튀기는 21세기 동아시아 혼돈의 깊은 밤을 흘러가는 조각달을 다시 적시고 있는 것만 같아 쓴웃음이 절로 머금어진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일본 식민 지배에 대한 원한과 열등감을 떨친 한국인들이 총칼로 한반도 사람들을 억눌렀던 것을 반성하는 일본인들과 함께 '목포의 눈물'을 즐겨 부를 수 있을는지...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2018년 11월 7일 수요일

Captives - 무의미한 상실(喪失)에 사로잡힌 포로들

스페인 내전 때 좌파 인민전선 정부를 지워하기 위해 참전한 외국인 의용군들. 1936. PHOTO TAKEN BY ALEC WAINMAN, © THE ESTATE OF ALEXANDER WHEELER WAINMAN, SERGE ALTERNÊS, JOHN ALEXANDER WAINMAN

Captives(포로들)


Some came in chains 더러는 쇠사슬에 묶여 들어왔지
Unrepentant but tired. 후회하지는 않으나 피곤해
Thinking and hating were finished 생각하고 미워하는 것 끝났네
Thinking and fighting were finished 생각하고 싸우는 것 끝났네
Retreating and hoping were finished. 후퇴하고 희망 품는 것 끝났네
Cures thus a long campaign, 괴짜들 그래서 긴 출정(出征)
Making death easy. 죽음도 쉽게 만들면서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년~1961년>


프리카 대륙 최고봉 킬리만자로에 신의 집이라 불리는 서쪽 봉우리에 얼어 죽은 한 마리의 표범이 있다? 아니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니스트 M.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가 버린 자아(自我)가 있다. 높이 5,895m, 세계최고의 화산,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적도 부근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꼭대기가 만년설로 덮여 있는 산, 스와힐리어(語)로 ‘빛나는 산’, 킬리만자로에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고 있지만 헤밍웨이의 ‘문학적 무덤’으로 더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태에 환멸을 느껴 허무주의에 푹 빠졌던 로스트제네레이션(Lost Generation)의 기수 헤밍웨이는 1936년에 발표한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The Snows of Kilimanjaro)에서 사냥 도중의 부상으로 괴저병을 얻어 죽음을 앞둔 작가 ‘해리’의 회고를 통해 안이한 생활로 예술가로서의 성실성을 상실했던 자기의 과거를 반성했었다. 작중 주인공 ‘해리’는 천부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돈, 여자, 술 오만과 편견, 권태와 속물근성에 파묻혀 위대한 작가 정신을 스스로 배반한 것을 몹시 후회하여 죽음을 원한다. 죽음만이 부끄러운 과거의 자기를 지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 길을 걸으면 번민과 고통은 사라지며, 저 은백(銀白)으로 빛나는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서는 순간 작가로서의 갱생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1939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할 당시의 헤밍웨이.
From Wikipedia
‘킬리만자로의 눈’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작가정신을 낱낱이 해체하여 혹독한 반성으로 재조립했던 헤밍웨이는 1940년 스페인 내전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발표하여 출세작 ‘무기여 잘 있거라’에 버금가는 호평을 받았고, 1952년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탈고한다. 이 작품으로 1953년 퓰리처상에 이어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헤밍웨이 역시 자신을 영원히 죽일 수는 없었다. 작가정신이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을 수없이 죽이지 않으면 메울 수 없는 것이 원고지였다. 1960년 쿠바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 말년의 안식지 핑카에서 쫓겨났고 아이다호 케첨에 새 둥지를 틀었으나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엽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드물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헤밍웨이는 이따금 시를 쓰기도 했다. 문학성으로만 따지자면 시라고 할 수도 없지만 시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었다. 스페인 내전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되새긴 것으로 보이는 ‘포로들(Captives)’도 그 중 하나다. 수사나 운율은 그저 그런 수준, 그러나 작품을 관통하는 시상만큼은 그의 소설작품에 비해 뒤지지 않는 것 같다. 포로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생각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후퇴하다가 붙잡혔나?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죽음도 쉽게 여겼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등 그가 대표작들을 통해 던졌던 질문을 짧게 요약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그가 자살을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성급한 추론도 고개를 들고. 신문기자로서, 신념을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참전 군인으로서, 인생과 세상을 자세히 관찰했던 작가로서 헤밍웨이가 얻은 결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헤밍웨이는 이 세상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포로수용소로 인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도 그런 시각에서 다시 읽어보면 훨씬 더 이해가 쉬워진다. 그의 또 다른 시 ‘아들에게 주는 충고(Advice To A Son)’를 보면 이 세상 인간의 삶에 대한 시니컬한 그의 관찰이 잘 드러난다. 다음은 ‘Advice To A Son(아들에게 주는 충고)’의 전문.

1926년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헤밍웨이와 그의
첫번째 부인 엘리자베쓰 해들리 리차드슨, 
그리고 아들 잭. From Wikipedia
Never trust a white man, 절대로 백인을 믿지 마라,(그들은 교활한 놈들이다)
Never kill a Jew, 절대로 유태인을 죽이지 마라,(그들은 끈질긴 놈들이다)
Never sign a contract, 절대로 계약서에 사인하지 마라(너를 옭아맨다)
Never rent a pew. 절대로 교회 긴 의자를 빌리지 마라(현실적인 노력은 안하고 기도나 해서 뭔가 얻으려고 하지 마라)
Don't enlist in armies; 군대에 가지 마라(이념이나 사상에 휩쓸려 총알받이가 되지 마라)
Nor marry many wives; 결혼을 여러 번 하지 마라(진정으로 너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함께 살아라)
Never write for magazines; 잡지에 투고하지 마라(몇 푼 원고료 때문에 작가로서의 양심이나 품위 등 잃는 게 더 많다)
Never scratch your hives. 부스럼을 긁지 마라(작은 갈등을 키우지 마라)
Always put paper on the seat, 변기에는 종이를 깔고 앉아라(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Don't believe in wars, 전쟁을 믿지 마라(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선동에 속지 마라)
Keep yourself both clean and neat, 너 자신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하라(타인에게 손가락질 받지 마라)
Never marry whores. 절대로 창녀하고는 결혼하지 마라(돈을 위해 순결을 파는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마라)
Never pay a blackmailer, 절대로 협박하는 놈에게는 돈 주지 마라(협박에 굴복하지 마라, 그 놈들은 끝까지 뜯어먹으려고 덤벼든다)
Never go to law, 송사하지 마라(이겨봤자 남는 게 없고 잃는 게 더 많다)
Never trust a publisher, 절대로 출판업자들을 믿지 마라(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출판을 할 뿐 너를 위하는 건 아니다)
Or you'll sleep on straw. 안 그러면 넌 지푸라기 위에서 자게 된다(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신세 처량하게 된다)
All your friends will leave you 모든 너의 친구들을 너를 떠난다(우정에 의지하지 마라)
All your friends will die 모든 너의 친구들은 죽는다
So lead a clean and wholesome life 깨끗하고 건전하게 살아서
And join them in the sky.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라

여기서 ‘아들’은 헤밍웨이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아들 같은 젊은이,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헤밍웨이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세상을 정리해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인들의 교활함과 유태인들의 끈질긴 근성, 비참한 현실을 치유 못하는 종교의 무기력함, 이념과 이념이 충돌하는 전쟁의 무의미성, 네 번의 결혼을 하면서 깨달은 여자들의 속물근성, 예기치 못한 세상살이의 위험, 지나가고 나면 덧없게 느껴지는 우정 등등 모두 헤밍웨이 자신이 젊어서부터 몸소 목격하고 체득한 것들임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런 실망감과 배신감과 허무감이 뒤섞이고 뒤섞여 헤밍웨이로 하여금 ‘로스트 제네레이션’의 깃발을 들게 만든 건 아니었는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문호의 시작(詩作) 치고는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유치한 시작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허무와 고독을 분석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한 데 대해서는 “역시 헤밍웨이답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고 싶다.

2017년 8월 5일 토요일

산석(山石) - 반골(反骨)의 마음 다스리기

아이슬란드 싱벨리어 국립공원의 한 야산 꼭대기에 서 있는 돌탑.










산석(山石)

山石犖確行徑微 (산석락확항경미) 산석은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데 가는 길은 좁아
黃昏到寺蝙蝠飛 (황혼도사편복비) 황혼 녘 절에 이르니 박쥐들만 날아다니네
升堂坐階新雨足 (승당좌계신우족) 법당에 올라 섬돌에 앉으니 비가 발치를 적시는데
芭蕉葉大梔子肥 (파초섭대치자비) 파초 잎은 커지고 치자는 살이 찌는구나
僧言古壁佛畫好 (승언고벽불화호) 중이 말하기를 고벽의 불화가 좋다고 하기에
以火來照所見稀 (이화내조소견희) 불 들고 비춰보니 드물게 보는 것이네
鋪床拂席置羹飯 (포상불석치갱반) 상이 펴져 자리 쓸고 앉으니 국과 밥이 차려지고
疏糲亦足飽我飢 (소려역족포아기) 거친 현미밥일망정 주린 배 채우기에 넉넉하네
夜深靜臥百虫絶 (야심정와백충절) 밤 깊어 조용히 자리에 드니 벌레소리 그치고
淸月出嶺光入扉 (청월출령광입비) 맑은 달 고개 위에 솟아 문짝 틈으로 비춰드네
天明獨去無道路 (천명독거무도노) 날이 밝아 혼자 떠나는데 길이 없어 
出入高下窮煙霏 (출입고하궁연비) 높고 낮은 언덕길 오르내리다가 안개에 길이 막혔네
山紅澗碧紛爛漫 (산홍간벽분난만) 산 붉고 계곡물 푸르러 어지러이 뒤섞이는데
時見松櫪皆十圍 (시견송력개십위) 문득 보이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열 겹
當流赤足蹋澗石 (당류적족답간석) 흐르는 물 있어 발을 담구고 개울 돌 밟으니 
水聲激激風吹衣 (수성격격풍취의) 물소리 요란하고 바람에 옷자락 나부끼네
人生如此自可樂 (인생여차자가낙) 인생이 이와 같으면 절로 즐거워질 만한데
豈必局束爲人鞿 (개필국속위인기) 어찌 일에 얽히어 고삐를 잡힐까
嗟哉吾黨二三子 (차재오당이삼자) 안타깝구나, 나와 무리지어 놀던 친구들이여
安得至老不更歸 (안득지노부갱귀) 어찌 다 늙도록 다시 돌아오지 못 하는가

                                                                           <한유(韓愈); 768년-824년>

이 먹을수록, 세상 경험이 많아질수록, 사람의 생각도 바뀐다. 생각이 바뀌면 경물(景物)도 달라 보인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도 한다. 그 말을 어떤 사람들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풀이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 세상만사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만 천만의 만만의 말씀, 자신의 마음이 변하고 그 변화에 따라 세상만사가 달라 보인다는 또 다른 이치를 잠시 까먹은 사람들의 섣부른 단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음을 다스리면 저 마음이 고개를 쳐들어 세상만사는커녕 자기 마음을 채 다스리기도 전에 죽는 게 장삼이사의 인생이라는 것을 나이 먹어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자기최면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속인다고나 할까, 자기를 속일 수 있으면 세상을 속일 수 있다는 논리의 비약을 함부로 비웃을 수가 없다. 세상을 원망하다가 모두 다 용서해주고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상 원망해봤자 내 속만 끓일 뿐 세상은 변함이 없어서, 결국은 마음이나마 편하게 먹고자 포기와 체념을 용서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만소당죽장화전(晩笑堂竹荘畫傳, 1921년 발행)에 
실려 있는 한유의 초상
지금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당(唐)의 문장가 한유(韓愈)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잃고 또 3세에 아버지가 타계하여 박복하기 짝이 없는 유년을 보내던 중 14세에 형 한회(韓會)까지 죽자 형수 정씨에게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한유, 7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하여 13세에 문장에 재능을 보였다고 하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고는 세 번씩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관직에 천거됐던 불운한 청년, 세상을 원망할 자격(?)이 차고 넘쳤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골 기질을 키웠던 듯싶다. 현실비판 의식이 강했다. 육조(六朝) 이래 문단의 정형처럼 유행해온 병려체(騈儷體)에 대하여 수사주의에 치중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유스러운 형식을 표본으로 하는 한대 이전의 고문(古文)을 부활시키자고 주장했던 것도 그렇고, 태자가 요절하여 비통해하다가 불교에 빠져들던 헌종(憲宗)이 막대한 재물을 들여 법문사(法門寺) 불사리를 궁중으로 들여와 공양하자‘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를 올려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된다(佛不足信)"고 간언했던 것도 그의 반골기질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에 헌종이 대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중신들의 간언으로 사형만은 면한 채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당하고 만다. 헌종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국자제주(國子祭酒), 병부시랑(兵部侍郞), 이부시랑(吏部侍郞), 어사대부(御史大夫) 등등의 직을 역임하다가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한유가 낙백의 시절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시 ‘산석(山石)’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는지 진하게 드러난다. ‘산석은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데 가는 길은 좁다’는 것은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는 심정의 토로, ‘황혼녘’은 ‘낙백의 길’이고 ‘박쥐’는 자신을 헐뜯고 모함하는 무리, 배불론(排佛論)을 부르짖던 자신이 절간을 찾아 한 끼니 신세를 지리라고는 전에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어쩌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런 상상을 해봤는지도 모르겠다. 고벽의 불화가 좋다는 중의 말에 마지못해 감상하는 척 하고는 ‘드물다’(稀)고 평한 것도 그런 방증의 하나로 보인다. ‘稀‘는 ’보기 드물다’는 뜻도 있지만 ‘희미하다’라는 뜻도 있는 바, 중이 좋다고 하는 고벽의 불화를 봤더니 희끄무레해서 잘 보이지 않더라(별 것 아니더라)는 중의가 읽혀진다. 입안에서 껄끄럽게 따로 도는 거친 현미밥을 시장기를 반찬삼아 배불리 먹었다는 것도 그렇고! 벌레소리와 맑은 달빛과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와 개울물과 옷자락 나부끼는 바람만으로도 인생이 줄거울 수 있다는 자기최면에 이어 ‘자신과 무리지어 놀던 친구들’(吾黨二三子)에게까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확신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안쓰럽기도 하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처가 아닌 한 누구라서 부인하랴. 한유가 마음을 다스리면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불교를 배척하고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이성을 가다듬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를 숭상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을 스쳐가는 풍월으로라도 모두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 문구 하나만으로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게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 세상을 사는 인생의 깨달음이기에 아직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고뇌와 번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2017년 7월 14일 금요일

정인벽옥가 (情人碧玉歌) - 여자의 첫 경험



情人碧玉歌 (정인벽옥가)  2수


碧玉小家女 (벽옥소가녀) 벽옥은 작은 집 여자(첩) 
不敢攀貴德 (불감반귀덕) 감히 귀한 분에게 매달릴 수 없어
感郎千金意 (감랑천금의) 낭군의 천금 같은 뜻을 고맙게 여길 뿐이네 
慙無傾城色 (참무경성색) 성을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답지 못함이 부끄럽네

碧玉破瓜時 (벽옥파과시) 벽옥이 외를 깰 때
郎爲情顚倒 (낭위정전도) 낭군이 정을 베풀어 껴안고 뒹구네
感君不羞赧 (감군불수난) 낭군이 싫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음이 느껴지니
廻身就郞抱 (회신취랑포) 몸을 돌려 낭군 품에 안기네

                                                                               <손작(孫綽); 314년-371년>

령(年齡)이란 게 뭔가? 년(年)은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에서 나온 말로 본래 ‘벼가 익다’라는 의미였으나, 벼는 일년에 한 번 익으므로 통상 일모작이었던 한자문화권에서는 자연스레 ‘한 해’를 뜻하게 됐다. 또 령(齡)은 앞니를 의미하는 ‘치’(齒)가 ‘령’(令)과 붙어서 된 말로 일년에 앞니가 하나씩 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앞니가 하나씩 빠지는 소나 말의 나이를 가리켰다. 그 두 글자가 서로 붙어 나이를 의미하는 연령(年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미개한 농경사회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생존해온 시간을 따질 때 연령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었겠지만 사회가 발달하고 분화되면서 단순히 태어나서 지나는 시간을 달력에 따라 계산한 역연령(曆年齡, Chronological age), 사람의 뼈가 형성되는 골화과정(骨化過程)이 나이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X선으로 촬영하여 측정하는 골격연령(骨格年齡, Skeletal age), 지능 발달로 측정하는 정신연령(精神年齡, Mental age) 등 여러 가지 방법이 등장하게 된다. 

여자가 섹스를 알게 되는 나이는? 한국서 초등학교 여학생들까지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찍어 음란물 사이트에 판매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지만 그건 발랑 까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일 뿐 자고로 초경(初經) 전후에 섹스를 알게 된다는 게 정설, 요즘엔 여자아이들이 조숙하여 13-14세라지만 그 옛날엔 16세쯤 초경을 경험했었다. 파과지년(破瓜之年)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瓜(과)’자 가운데를 나누면 두 개의 '八(팔)'자 두 개가 되는데, 그것들을 합하면 16이 되어 여자 나이 16세 즉 ‘이팔청춘’을 뜻하는 바, '외를 깬다'라는 의미의 '파과(破瓜)'를 요즘 말로 풀이하면 '처녀성을 잃다'일 것이다. 이 때의 ‘외’는 길쭉한 한국산 오이가 아니라 속에 붉은 빛이 감도는 외, 청(淸)나라 문인 원매(袁枚) 또한 그의 시론(詩論)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파과, 어떤 사람들은 이를 ’초경이 시작되었을 때 외를 깰 때처럼 곧 홍조를 보게 된다‘고 풀이한다(破瓜 或解以爲月事初來 如破瓜則見紅潮者)”고 말했고, 같은 청나라 학자 적호(翟灝)도 ‘통속편(通俗編)’에서 “풍속을 살피건대, 여자가 몸을 깨는 것을 외를 깬다고 한다(按俗以女子破身爲破瓜)”고 적었다. 그러나 남자의 파과지년(破瓜之年)은 다르다. ‘八’ 두 개를 곱하면 64가 되는데, 남자 나이 64세면 혼자 잠자리에 든다는 의미로서, 송(宋)나라 축목(祝穆)은 ‘사문유취(事文類聚)’에서 “당나라 여동빈(呂洞賓)이 장기에게 보낸 시에 '공성당재파과년(功成當在破瓜年)'이라는 구절이 있는 바, '파과'는 남자의 나이 64세를 뜻하기도 한다”라고 기록했었다.

‘파과지년’의 원전은 중국 진(晉)나라 시대의 시인 손작(孫綽) 시 ‘정인벽옥가(情人碧玉歌)’, 진나라 항간에 유행했던 악부(樂府)로서, 여남왕(汝南王) 사마의(司馬義)가 자신의 애첩 벽옥(碧玉)을 위해 손작에게 청하여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만, 이후에도 이런 저런 ‘벽옥가’가 유행한 것을 보면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던 사랑노래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싶다. 또 송나라 때 곽무천(郭茂倩: 1041-1099)이 편찬했다는 ‘악부시집’(樂府詩集)‘에는 “송(남북조시대)의 여남왕이 지었다(宋汝南王作)”고 쓰여 있지만 곽무천이 옛날 노래들을 채집 수록할 때 진나라 손작의 ’정인벽옥가‘를 모방하여 유행했던 ’벽옥가‘를 엄밀히 구별하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정인벽옥가‘는 남자들을 위한 음란 시, 얌전한 아가씨들이 읽기엔 매우 부적합(?)한 시였을 것 같다.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성기에 삽입되어 처녀막이 파괴될 때, 남자는 흥분을 못 이겨 부르르 떨고, 여자도 그런 남자의 사랑을 감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몸을 돌려 남자 품에 안긴다는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다. 어떤 사람들은 ‘벽옥(碧玉)’을 밋밋하게 ‘푸른 구슬’이라고 번역하지만 천만의 말씀, 그 옛날 임금의 성기를 ‘옥근(玉根)’이라고 표현한데서 보듯 ‘벽옥’은 매끄럽고 푸른 색깔의 남성 성기를 은유적으로 일컬은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전도(顚倒)’는 ‘난새(방울새)를 엎어지게 하고 봉황새를 넘어뜨리다’라는 의미의 ‘전란도봉(顚鸞倒鳳)’의 줄임말로 남녀가 정사를 벌이는 것을 말한다. 섹스와 연관되었을 때는 ‘남자’ ‘사내’를 뜻하는 ‘랑(郎)’을 쓰고 순정이나 사랑과 연관되었을 때는 ‘님’ ‘남편’을 뜻하는 ‘군(君)’자를 쓴 것도 이채롭다. 여자가 섹스를 할 때는 상대를 남자로 인식하지만 사랑을 느낄 때는 님으로 여긴다는 함의가 읽혀지기도 한다. 

후대에 그려진 손작의 초상
손작이 어떤 사람이기에 남녀상열(男女相悅)을 드러내놓고 까발리는 것을 터부시하던 시절에 그런 음란한 시를 썼나? 손작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자유분방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기품이 있었고 솔직담백했다고 전해진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왕희지가 풍광이 아름다운 회계(會稽)의 난정(蘭亭)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를 열어 문사 41명의 시문을 묶은 책을 엮고는 저 유명한 서문 ‘난정서(蘭亭序)’를 썼을 때 그 뒤에 또 다른 서문 ‘난정후서(蘭亭後序)’를 붙일 정도로 당대에 글재주를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어 그 두 종교를 한 작품 속에 용해시킨 그의 대표작 ‘유천태산부(遊天臺山賦)’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그가 남녀의 섹스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정인벽옥가’가 사족(士族)들에게까지 읽혀지면서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도 그의 명성이 작품의 통속성을 덮어버릴 만큼 높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