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30일 토요일

목포의 눈물-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1930년대 목포 시가지 전경. 멀리 삼학도가 보인다.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찧타 옛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1935년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 이난영(李蘭影) 노래> 


한반도 사람 치고 목포(木浦)가 항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 없을 것 같은데...'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가 있다? 그렇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는 '뽕짝'이다? 그것도 그렇다. '뽕짝' 하면 한국인들은 6,70년대의 이미자나 남진 나훈아를 떠올리지만 기실은 일본인들이 고유의 민속음악에 미국서 유행하던 리듬 '폭스 트롯트(Fox Trot)'를 접목시킨 '엔카[演歌]'라는 게 정설, 영어 발음이 서투른데다가 'ㅌ' 발음을 잘 못하는 일본인들이 '도롯도'라고 하던 것을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열등감으로 일본과 관련된 것이면 뭐든지 눈을 흘기는 한국인들이 뽕짝 뽕짝 뽕짜작 뽕짝 2/4 박자 또는 4/4박자를 의성(擬聲)하여 '뽕짝'이라고 비하했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겉으론 일본을 미워하면서도 일본에 의해 근대화된 탓에 일본 것 빼고나면 남는 게 별로 없어 일식집서 '사시미'와 '사케' 즐기면서 시름을 달래던 6,70년대 한국인들의 자가당착(自家撞着) 자조(自嘲)라고나 할까, 줄여 말하자면 '뽕짝'은 한일 양국의 과거와 현재를 적나라하게 까발려주는 단어들 중의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목포'라는 항구만해도 그렇다. 일찍이 그 이름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다지만 제대로된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97년 10월 일본에 의해 개항된 이후 부터라는 것을 여태껏 일본인들을 '쪽바리'라고 부르는 한국인들도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4분의 2박자, 라단조, 약간 빠른 빠르기의 '목포의 눈물'은 예사 '뽕짝'과는 다르다. 1930년대 한반도 사회를 함축한 한편의 시(詩)다. 일제 총독부가 조선인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문화정책을 펴던 1935년 초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주최한 제1회 ‘전국 6대 도시의 향토찬가’ 공모전에 무명 시인 청년 문일석(文一石)이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 당선됐고,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어서 일본서 음악을 공부한 작곡가 손목인(孫牧人)의 곡을 붙였고, 그걸 목포 출신의 십대 후반 신인 가수 이난영(李蘭影)에게 부르게 해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목포 출신 청년이 그려낸 목포의 정서를 목포 출신의 여가수가 불렀다고 해서 목포 사람들은 '1980년 5·18로 희생당한 전라도의 애국가'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니 '해태 타이거스의 응원가'니 뭐니 유달산 중턱에 노래비를 세워놓을 정도로 기리고 있지만 민족주의나 향토색 걷어내고 보면 목포 사람들은 물론 그 시대 한반도 사람들과 일본인들의 감성을 함께 아우른 명작으로 보는 게 옳을 듯 싶다. 혹자는 2절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를 임진왜란 때 왜적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과 곧바로 연결시켜 민족적 열등감을 삭히기도 하지만, 노래 자체가 일본풍 '뽕짝'이어서 일본인들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1914년 대전-목포간 호남선 철도를 개통하는 등 보잘 것 없던 포구 목포를 당시 인구 6만의 조선 6대 도시의 하나로까지 키웠던 일본인들이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피압박 조선 사람들의 정한 표출을 적당히 눈감아 주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 못했을 터, '목포의 눈물'을 목포에만 묶어두는 데에는 고개가 좌우로 흔들어진다. 시가 시인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것이듯, '목포의 눈물' 또한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은 음반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이 불운하여 49세에 세상을 뜬 이난영이나 서슬 퍼렇던 일제 강점기 군국주의 미화 가요를 작곡하여 '친일 부역자'로 낙인 찍힌 손목인의 것이 아니라 어느 때 어디서라도 호젓하게 즐겨 부르는 사람들의 것이 아닐까. '목포의 눈물'이 유행의 파도 깊이 숨어들어 잊혀지는 여타 유행가와는 달리 지금껏 애창되고 있는 것도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 '뽕짝'의 차원을 훌쩍 넘어섰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해방 후 발매된 이난영의 히트곡 모음 음반.
'목포의 눈물'은 여럿이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로 부르기보다는 혼자서 술 한잔 홀짝이면서 시로 읽는 게 더 가슴에 와닿는다. 그 시를 지었다는 문일석도 예사 인물이 아니었던 듯 싶다. 와세다 대학 유학생으로서 본명이 '윤재희'였고 일제 징용을 피해 돌아다니다가 병을 얻어 1944년 2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는 미확인 전설(?)은 차치하더라도, '목포의 눈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와 일본에서 울려퍼졌건만 “내가 바로 문일석”이라고 자랑한 사람은 커녕 그 가족 조차 나타나지 않은 '그럴만한 이유'도 궁금하거니와, 한반도에서 현대시가 겨우 모양을 갖춰가던 그 시절에 무명 문학청년이 당대 어느 유명 시인도 함부로 흉내내지 못할 공감각적(共感覺的) 대구(對句)들을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엮어냈다는 게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구절구절 다시 음미해보자. 사공의 뱃노래가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가운데 깊은 밤 흘러가는 조각달이 옛상처를 새록새록 떠올리게 한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이라는 회한의 탄식이 어찌 절로 터져나오지 않겠는가! 감상적 이미지의 단어들을 적당히 나열해놓고 시라고 우기던 그 때 그 시절의 시작(詩作)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칭찬이 아깝지 않다. 

노래는 세월 따라, 세월은 노래 따라? 해방 전 10대 후반의 신인 이난영이 특유의 비음(鼻音)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으로 '목포의 눈물'을 불러 일본서 들여온 축음기를 돌리고 또 돌린 데 이어 해방 후 먹고 살만해진 일본인들이 한반도 식민지 시절의 향수에다 기생관광을 덤으로 얹어 즐기던 1970년대 이난영의 아들뻘 가수 조용필이 특유의 쉰소리와 흐느끼는 듯한 창법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가라오케 술집의 마이크를 적시고 또 적신 게 우연인가? 한국과 일본 양국이 일제하 징용 및 위안부 배상문제를 놓고 수출규제가 어쩌고 지소미아(GSOMIA-1945년 광복 이후 한·일 양국이 맺은 유일한 군사협정) 파기가 저쩌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가운데 목포 출신 판소리 명창 박금희로부터 수궁가 춘향가를 사사받으면서 목청을 틔웠다는 이난영 손녀뻘 가수 송가인이 조선일보 계열사 TV조선 주최 '내일은 미스트롯' 경연에서 `우승하여 스타덤에 올랐다? 한 세기 전 목포 앞바다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들었던 '목포의 눈물'이 국가간 체면과 이익의 충돌이 불꽃 튀기는 21세기 동아시아 혼돈의 깊은 밤을 흘러가는 조각달을 다시 적시고 있는 것만 같아 쓴웃음이 절로 머금어진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일본 식민 지배에 대한 원한과 열등감을 떨친 한국인들이 총칼로 한반도 사람들을 억눌렀던 것을 반성하는 일본인들과 함께 '목포의 눈물'을 즐겨 부를 수 있을는지...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2018년 11월 7일 수요일

Captives - 무의미한 상실(喪失)에 사로잡힌 포로들

스페인 내전 때 좌파 인민전선 정부를 지워하기 위해 참전한 외국인 의용군들. 1936. PHOTO TAKEN BY ALEC WAINMAN, © THE ESTATE OF ALEXANDER WHEELER WAINMAN, SERGE ALTERNÊS, JOHN ALEXANDER WAINMAN

Captives(포로들)


Some came in chains 더러는 쇠사슬에 묶여 들어왔지
Unrepentant but tired. 후회하지는 않으나 피곤해
Thinking and hating were finished 생각하고 미워하는 것 끝났네
Thinking and fighting were finished 생각하고 싸우는 것 끝났네
Retreating and hoping were finished. 후퇴하고 희망 품는 것 끝났네
Cures thus a long campaign, 괴짜들 그래서 긴 출정(出征)
Making death easy. 죽음도 쉽게 만들면서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년~1961년>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 킬리만자로에 신의 집이라 불리는 서쪽 봉우리에 얼어 죽은 한 마리의 표범이 있다? 아니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니스트 M.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가 버린 자아(自我)가 있다. 높이 5,895m, 세계최고의 화산,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적도 부근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꼭대기가 만년설로 덮여 있는 산, 스와힐리어(語)로 ‘빛나는 산’, 킬리만자로에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고 있지만 헤밍웨이의 ‘문학적 무덤’으로 더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태에 환멸을 느껴 허무주의에 푹 빠졌던 로스트제네레이션(Lost Generation)의 기수 헤밍웨이는 1936년에 발표한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The Snows of Kilimanjaro)에서 사냥 도중의 부상으로 괴저병을 얻어 죽음을 앞둔 작가 ‘해리’의 회고를 통해 안이한 생활로 예술가로서의 성실성을 상실했던 자기의 과거를 반성했었다. 작중 주인공 ‘해리’는 천부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돈, 여자, 술 오만과 편견, 권태와 속물근성에 파묻혀 위대한 작가 정신을 스스로 배반한 것을 몹시 후회하여 죽음을 원한다. 죽음만이 부끄러운 과거의 자기를 지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 길을 걸으면 번민과 고통은 사라지며, 저 은백(銀白)으로 빛나는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서는 순간 작가로서의 갱생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1939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할 당시의 헤밍웨이.
From Wikipedia
‘킬리만자로의 눈’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작가정신을 낱낱이 해체하여 혹독한 반성으로 재조립했던 헤밍웨이는 1940년 스페인 내전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발표하여 출세작 ‘무기여 잘 있거라’에 버금가는 호평을 받았고, 1952년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탈고한다. 이 작품으로 1953년 퓰리처상에 이어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헤밍웨이 역시 자신을 영원히 죽일 수는 없었다. 작가정신이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을 수없이 죽이지 않으면 메울 수 없는 것이 원고지였다. 1960년 쿠바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 말년의 안식지 핑카에서 쫓겨났고 아이다호 케첨에 새 둥지를 틀었으나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엽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드물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헤밍웨이는 이따금 시를 쓰기도 했다. 문학성으로만 따지자면 시라고 할 수도 없지만 시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었다. 스페인 내전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되새긴 것으로 보이는 ‘포로들(Captives)’도 그 중 하나다. 수사나 운율은 그저 그런 수준, 그러나 작품을 관통하는 시상만큼은 그의 소설작품에 비해 뒤지지 않는 것 같다. 포로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생각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후퇴하다가 붙잡혔나?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죽음도 쉽게 여겼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등 그가 대표작들을 통해 던졌던 질문을 짧게 요약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그가 자살을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성급한 추론도 고개를 들고. 신문기자로서, 신념을 위해 죽음도 불사했던 참전 군인으로서, 인생과 세상을 자세히 관찰했던 작가로서 헤밍웨이가 얻은 결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헤밍웨이는 이 세상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포로수용소로 인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도 그런 시각에서 다시 읽어보면 훨씬 더 이해가 쉬워진다. 그의 또 다른 시 ‘아들에게 주는 충고(Advice To A Son)’를 보면 이 세상 인간의 삶에 대한 시니컬한 그의 관찰이 잘 드러난다. 다음은 ‘Advice To A Son(아들에게 주는 충고)’의 전문.

1926년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헤밍웨이와 그의
첫번째 부인 엘리자베쓰 해들리 리차드슨, 
그리고 아들 잭. From Wikipedia
Never trust a white man, 절대로 백인을 믿지 마라,(그들은 교활한 놈들이다)
Never kill a Jew, 절대로 유태인을 죽이지 마라,(그들은 끈질긴 놈들이다)
Never sign a contract, 절대로 계약서에 사인하지 마라(너를 옭아맨다)
Never rent a pew. 절대로 교회 긴 의자를 빌리지 마라(현실적인 노력은 안하고 기도나 해서 뭔가 얻으려고 하지 마라)
Don't enlist in armies; 군대에 가지 마라(이념이나 사상에 휩쓸려 총알받이가 되지 마라)
Nor marry many wives; 결혼을 여러 번 하지 마라(진정으로 너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함께 살아라)
Never write for magazines; 잡지에 투고하지 마라(몇 푼 원고료 때문에 작가로서의 양심이나 품위 등 잃는 게 더 많다)
Never scratch your hives. 부스럼을 긁지 마라(작은 갈등을 키우지 마라)
Always put paper on the seat, 변기에는 종이를 깔고 앉아라(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Don't believe in wars, 전쟁을 믿지 마라(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선동에 속지 마라)
Keep yourself both clean and neat, 너 자신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하라(타인에게 손가락질 받지 마라)
Never marry whores. 절대로 창녀하고는 결혼하지 마라(돈을 위해 순결을 파는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마라)
Never pay a blackmailer, 절대로 협박하는 놈에게는 돈 주지 마라(협박에 굴복하지 마라, 그 놈들은 끝까지 뜯어먹으려고 덤벼든다)
Never go to law, 송사하지 마라(이겨봤자 남는 게 없고 잃는 게 더 많다)
Never trust a publisher, 절대로 출판업자들을 믿지 마라(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출판을 할 뿐 너를 위하는 건 아니다)
Or you'll sleep on straw. 안 그러면 넌 지푸라기 위에서 자게 된다(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신세 처량하게 된다)
All your friends will leave you 모든 너의 친구들을 너를 떠난다(우정에 의지하지 마라)
All your friends will die 모든 너의 친구들은 죽는다
So lead a clean and wholesome life 깨끗하고 건전하게 살아서
And join them in the sky.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라

여기서 ‘아들’은 헤밍웨이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아들 같은 젊은이,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헤밍웨이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세상을 정리해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인들의 교활함과 유태인들의 끈질긴 근성, 비참한 현실을 치유 못하는 종교의 무기력함, 이념과 이념이 충돌하는 전쟁의 무의미성, 네 번의 결혼을 하면서 깨달은 여자들의 속물근성, 예기치 못한 세상살이의 위험, 지나가고 나면 덧없게 느껴지는 우정 등등 모두 헤밍웨이 자신이 젊어서부터 몸소 목격하고 체득한 것들임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런 실망감과 배신감과 허무감이 뒤섞이고 뒤섞여 헤밍웨이로 하여금 ‘로스트 제네레이션’의 깃발을 들게 만든 건 아니었는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문호의 시작(詩作) 치고는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유치한 시작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허무와 고독을 분석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한 데 대해서는 “역시 헤밍웨이답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고 싶다.

2017년 8월 5일 토요일

산석(山石) - 반골(反骨)의 마음 다스리기

아이슬란드 싱벨리어 국립공원의 한 야산 꼭대기에 서 있는 돌탑.










산석(山石)

山石犖確行徑微 (산석락확항경미) 산석은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데 가는 길은 좁아
黃昏到寺蝙蝠飛 (황혼도사편복비) 황혼 녘 절에 이르니 박쥐들만 날아다니네
升堂坐階新雨足 (승당좌계신우족) 법당에 올라 섬돌에 앉으니 비가 발치를 적시는데
芭蕉葉大梔子肥 (파초섭대치자비) 파초 잎은 커지고 치자는 살이 찌는구나
僧言古壁佛畫好 (승언고벽불화호) 중이 말하기를 고벽의 불화가 좋다고 하기에
以火來照所見稀 (이화내조소견희) 불 들고 비춰보니 드물게 보는 것이네
鋪床拂席置羹飯 (포상불석치갱반) 상이 펴져 자리 쓸고 앉으니 국과 밥이 차려지고
疏糲亦足飽我飢 (소려역족포아기) 거친 현미밥일망정 주린 배 채우기에 넉넉하네
夜深靜臥百虫絶 (야심정와백충절) 밤 깊어 조용히 자리에 드니 벌레소리 그치고
淸月出嶺光入扉 (청월출령광입비) 맑은 달 고개 위에 솟아 문짝 틈으로 비춰드네
天明獨去無道路 (천명독거무도노) 날이 밝아 혼자 떠나는데 길이 없어 
出入高下窮煙霏 (출입고하궁연비) 높고 낮은 언덕길 오르내리다가 안개에 길이 막혔네
山紅澗碧紛爛漫 (산홍간벽분난만) 산 붉고 계곡물 푸르러 어지러이 뒤섞이는데
時見松櫪皆十圍 (시견송력개십위) 문득 보이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열 겹
當流赤足蹋澗石 (당류적족답간석) 흐르는 물 있어 발을 담구고 개울 돌 밟으니 
水聲激激風吹衣 (수성격격풍취의) 물소리 요란하고 바람에 옷자락 나부끼네
人生如此自可樂 (인생여차자가낙) 인생이 이와 같으면 절로 즐거워질 만한데
豈必局束爲人鞿 (개필국속위인기) 어찌 일에 얽히어 고삐를 잡힐까
嗟哉吾黨二三子 (차재오당이삼자) 안타깝구나, 나와 무리지어 놀던 친구들이여
安得至老不更歸 (안득지노부갱귀) 어찌 다 늙도록 다시 돌아오지 못 하는가

                                                                           <한유(韓愈); 768년-824년>

나이 먹을수록, 세상 경험이 많아질수록, 사람의 생각도 바뀐다. 생각이 바뀌면 경물(景物)도 달라 보인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도 한다. 그 말을 어떤 사람들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풀이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 세상만사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만 천만의 만만의 말씀, 자신의 마음이 변하고 그 변화에 따라 세상만사가 달라 보인다는 또 다른 이치를 잠시 까먹은 사람들의 섣부른 단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음을 다스리면 저 마음이 고개를 쳐들어 세상만사는커녕 자기 마음을 채 다스리기도 전에 죽는 게 장삼이사의 인생이라는 것을 나이 먹어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자기최면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속인다고나 할까, 자기를 속일 수 있으면 세상을 속일 수 있다는 논리의 비약을 함부로 비웃을 수가 없다. 세상을 원망하다가 모두 다 용서해주고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상 원망해봤자 내 속만 끓일 뿐 세상은 변함이 없어서, 결국은 마음이나마 편하게 먹고자 포기와 체념을 용서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만소당죽장화전(晩笑堂竹荘畫傳, 1921년 발행)에 
실려 있는 한유의 초상
지금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당(唐)의 문장가 한유(韓愈)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잃고 또 3세에 아버지가 타계하여 박복하기 짝이 없는 유년을 보내던 중 14세에 형 한회(韓會)까지 죽자 형수 정씨에게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한유, 7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하여 13세에 문장에 재능을 보였다고 하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고는 세 번씩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관직에 천거됐던 불운한 청년, 세상을 원망할 자격(?)이 차고 넘쳤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골 기질을 키웠던 듯싶다. 현실비판 의식이 강했다. 육조(六朝) 이래 문단의 정형처럼 유행해온 병려체(騈儷體)에 대하여 수사주의에 치중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유스러운 형식을 표본으로 하는 한대 이전의 고문(古文)을 부활시키자고 주장했던 것도 그렇고, 태자가 요절하여 비통해하다가 불교에 빠져들던 헌종(憲宗)이 막대한 재물을 들여 법문사(法門寺) 불사리를 궁중으로 들여와 공양하자‘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를 올려 "부처는 믿을 것이 못된다(佛不足信)"고 간언했던 것도 그의 반골기질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에 헌종이 대노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중신들의 간언으로 사형만은 면한 채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당하고 만다. 헌종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국자제주(國子祭酒), 병부시랑(兵部侍郞), 이부시랑(吏部侍郞), 어사대부(御史大夫) 등등의 직을 역임하다가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한유가 낙백의 시절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시 ‘산석(山石)’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는지 진하게 드러난다. ‘산석은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데 가는 길은 좁다’는 것은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는 심정의 토로, ‘황혼녘’은 ‘낙백의 길’이고 ‘박쥐’는 자신을 헐뜯고 모함하는 무리, 배불론(排佛論)을 부르짖던 자신이 절간을 찾아 한 끼니 신세를 지리라고는 전에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어쩌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런 상상을 해봤는지도 모르겠다. 고벽의 불화가 좋다는 중의 말에 마지못해 감상하는 척 하고는 ‘드물다’(稀)고 평한 것도 그런 방증의 하나로 보인다. ‘稀‘는 ’보기 드물다’는 뜻도 있지만 ‘희미하다’라는 뜻도 있는 바, 중이 좋다고 하는 고벽의 불화를 봤더니 희끄무레해서 잘 보이지 않더라(별 것 아니더라)는 중의가 읽혀진다. 입안에서 껄끄럽게 따로 도는 거친 현미밥을 시장기를 반찬삼아 배불리 먹었다는 것도 그렇고! 벌레소리와 맑은 달빛과 소나무와 상수리나무와 개울물과 옷자락 나부끼는 바람만으로도 인생이 줄거울 수 있다는 자기최면에 이어 ‘자신과 무리지어 놀던 친구들’(吾黨二三子)에게까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확신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안쓰럽기도 하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처가 아닌 한 누구라서 부인하랴. 한유가 마음을 다스리면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불교를 배척하고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이성을 가다듬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를 숭상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을 스쳐가는 풍월으로라도 모두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 문구 하나만으로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게 얼룩소처럼 우락부락한 세상을 사는 인생의 깨달음이기에 아직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고뇌와 번민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2017년 7월 14일 금요일

정인벽옥가 (情人碧玉歌) - 여자의 첫 경험



情人碧玉歌 (정인벽옥가)  2수


碧玉小家女 (벽옥소가녀) 벽옥은 작은 집 여자(첩) 
不敢攀貴德 (불감반귀덕) 감히 귀한 분에게 매달릴 수 없어
感郎千金意 (감랑천금의) 낭군의 천금 같은 뜻을 고맙게 여길 뿐이네 
慙無傾城色 (참무경성색) 성을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답지 못함이 부끄럽네

碧玉破瓜時 (벽옥파과시) 벽옥이 외를 깰 때
郎爲情顚倒 (낭위정전도) 낭군이 정을 베풀어 껴안고 뒹구네
感君不羞赧 (감군불수난) 낭군이 싫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음이 느껴지니
廻身就郞抱 (회신취랑포) 몸을 돌려 낭군 품에 안기네

                                                                               <손작(孫綽); 314년-371년>

연령(年齡)이란 게 뭔가? 년(年)은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에서 나온 말로 본래 ‘벼가 익다’라는 의미였으나, 벼는 일년에 한 번 익으므로 통상 일모작이었던 한자문화권에서는 자연스레 ‘한 해’를 뜻하게 됐다. 또 령(齡)은 앞니를 의미하는 ‘치’(齒)가 ‘령’(令)과 붙어서 된 말로 일년에 앞니가 하나씩 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앞니가 하나씩 빠지는 소나 말의 나이를 가리켰다. 그 두 글자가 서로 붙어 나이를 의미하는 연령(年齡)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미개한 농경사회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생존해온 시간을 따질 때 연령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었겠지만 사회가 발달하고 분화되면서 단순히 태어나서 지나는 시간을 달력에 따라 계산한 역연령(曆年齡, Chronological age), 사람의 뼈가 형성되는 골화과정(骨化過程)이 나이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X선으로 촬영하여 측정하는 골격연령(骨格年齡, Skeletal age), 지능 발달로 측정하는 정신연령(精神年齡, Mental age) 등 여러 가지 방법이 등장하게 된다. 

여자가 섹스를 알게 되는 나이는? 한국서 초등학교 여학생들까지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찍어 음란물 사이트에 판매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지만 그건 발랑 까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일 뿐 자고로 초경(初經) 전후에 섹스를 알게 된다는 게 정설, 요즘엔 여자아이들이 조숙하여 13-14세라지만 그 옛날엔 16세쯤 초경을 경험했었다. 파과지년(破瓜之年)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瓜(과)’자 가운데를 나누면 두 개의 '八(팔)'자 두 개가 되는데, 그것들을 합하면 16이 되어 여자 나이 16세 즉 ‘이팔청춘’을 뜻하는 바, '외를 깬다'라는 의미의 '파과(破瓜)'를 요즘 말로 풀이하면 '처녀성을 잃다'일 것이다. 이 때의 ‘외’는 길쭉한 한국산 오이가 아니라 속에 붉은 빛이 감도는 외, 청(淸)나라 문인 원매(袁枚) 또한 그의 시론(詩論)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파과, 어떤 사람들은 이를 ’초경이 시작되었을 때 외를 깰 때처럼 곧 홍조를 보게 된다‘고 풀이한다(破瓜 或解以爲月事初來 如破瓜則見紅潮者)”고 말했고, 같은 청나라 학자 적호(翟灝)도 ‘통속편(通俗編)’에서 “풍속을 살피건대, 여자가 몸을 깨는 것을 외를 깬다고 한다(按俗以女子破身爲破瓜)”고 적었다. 그러나 남자의 파과지년(破瓜之年)은 다르다. ‘八’ 두 개를 곱하면 64가 되는데, 남자 나이 64세면 혼자 잠자리에 든다는 의미로서, 송(宋)나라 축목(祝穆)은 ‘사문유취(事文類聚)’에서 “당나라 여동빈(呂洞賓)이 장기에게 보낸 시에 '공성당재파과년(功成當在破瓜年)'이라는 구절이 있는 바, '파과'는 남자의 나이 64세를 뜻하기도 한다”라고 기록했었다.

‘파과지년’의 원전은 중국 진(晉)나라 시대의 시인 손작(孫綽) 시 ‘정인벽옥가(情人碧玉歌)’, 진나라 항간에 유행했던 악부(樂府)로서, 여남왕(汝南王) 사마의(司馬義)가 자신의 애첩 벽옥(碧玉)을 위해 손작에게 청하여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만, 이후에도 이런 저런 ‘벽옥가’가 유행한 것을 보면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던 사랑노래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싶다. 또 송나라 때 곽무천(郭茂倩: 1041-1099)이 편찬했다는 ‘악부시집’(樂府詩集)‘에는 “송(남북조시대)의 여남왕이 지었다(宋汝南王作)”고 쓰여 있지만 곽무천이 옛날 노래들을 채집 수록할 때 진나라 손작의 ’정인벽옥가‘를 모방하여 유행했던 ’벽옥가‘를 엄밀히 구별하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정인벽옥가‘는 남자들을 위한 음란 시, 얌전한 아가씨들이 읽기엔 매우 부적합(?)한 시였을 것 같다.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성기에 삽입되어 처녀막이 파괴될 때, 남자는 흥분을 못 이겨 부르르 떨고, 여자도 그런 남자의 사랑을 감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몸을 돌려 남자 품에 안긴다는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다. 어떤 사람들은 ‘벽옥(碧玉)’을 밋밋하게 ‘푸른 구슬’이라고 번역하지만 천만의 말씀, 그 옛날 임금의 성기를 ‘옥근(玉根)’이라고 표현한데서 보듯 ‘벽옥’은 매끄럽고 푸른 색깔의 남성 성기를 은유적으로 일컬은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전도(顚倒)’는 ‘난새(방울새)를 엎어지게 하고 봉황새를 넘어뜨리다’라는 의미의 ‘전란도봉(顚鸞倒鳳)’의 줄임말로 남녀가 정사를 벌이는 것을 말한다. 섹스와 연관되었을 때는 ‘남자’ ‘사내’를 뜻하는 ‘랑(郎)’을 쓰고 순정이나 사랑과 연관되었을 때는 ‘님’ ‘남편’을 뜻하는 ‘군(君)’자를 쓴 것도 이채롭다. 여자가 섹스를 할 때는 상대를 남자로 인식하지만 사랑을 느낄 때는 님으로 여긴다는 함의가 읽혀지기도 한다. 

후대에 그려진 손작의 초상
손작이 어떤 사람이기에 남녀상열(男女相悅)을 드러내놓고 까발리는 것을 터부시하던 시절에 그런 음란한 시를 썼나? 손작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자유분방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기품이 있었고 솔직담백했다고 전해진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왕희지가 풍광이 아름다운 회계(會稽)의 난정(蘭亭)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를 열어 문사 41명의 시문을 묶은 책을 엮고는 저 유명한 서문 ‘난정서(蘭亭序)’를 썼을 때 그 뒤에 또 다른 서문 ‘난정후서(蘭亭後序)’를 붙일 정도로 당대에 글재주를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어 그 두 종교를 한 작품 속에 용해시킨 그의 대표작 ‘유천태산부(遊天臺山賦)’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그가 남녀의 섹스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정인벽옥가’가 사족(士族)들에게까지 읽혀지면서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도 그의 명성이 작품의 통속성을 덮어버릴 만큼 높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017년 6월 29일 목요일

엄마 걱정 - 시인의 '심적 외상(心的外傷, Psychological trauma)'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입 속의 검은 잎’(1989, 문학과 지성사), 기형도(奇亨度: 1960~1989)>


세계의 중심은 ‘나’다. 동서남북의 방위도 ‘나’를 중심으로 정해지는 것이고 ‘나’의 눈에 빨강색의 안경이 걸쳐지면 세계는 빨갛게 보이고 파란색의 안경이 걸쳐지면 파랗게 보인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일찍이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치고 석가의 제자들이 입만 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부르짖었던 것도 ’나‘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과 무관치 않다. '나'의 번뇌는 '나'로 말미암은 것,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불안과 고독의 뿌리가 '나'라는 데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세계의 중심인 '나'의 경험과 지식이 작용하는 사고(思考)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어떤 자극에 대해 적응하지 못할 때 불안이 야기되고, 그 불안을 해소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나'를 동정(同情)하거나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문득 외로움에 휩싸이고, 그런 외로움이 겹겹이 쌓여 굳어지면 고독이라는 감옥으로 변하지 않던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인간은 누구나 다 불안과 고독의 감옥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이 복잡다단해지면서 불확실성이 극대화되던 19세기 후반 '나'의 자유와 책임과 주관성을 중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불안과 고독을 화두로 삼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년~1855년)는 불안과 고독의 뿌리를 원죄와 구원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격에서 찾았지만 기독교의 우산에서 벗어났던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년~1976년)는 인간의 존재 확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했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그 어떤 특별한 의미 없이 세계로 '내던져진 자'로서, 모든 것은 오직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는 바, 자신의 '내던져짐'과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맡겨져 있음'에 대해 권태로워하면서 불안해하고 결국에는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죽음과 대면해야 하므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른 바 '현존재(Dasein)'의 자각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 즉 ’나‘는 무엇이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게 불안이고 고독이라고 하이데거는 주장했었다.

불안과 고독도 지나치면 병, 그게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커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으면 '심적 외상(心的 外傷, Psychological trauma)'을 남긴다. 일찍이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S. 프로이트와 J. 브로이어(Josef Breuer)는 공동연구를 통해 히스테리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잊혀져가는 마음의 상처(심적 외상)를 상기시키면 히스테리가 치유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인간에게 있어서 몹시 불쾌하고 강렬한 체험(심적 외상)은 자신의 정신적 안정을 위협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억압이라는 기제(機制)에 의하여 의식 세계에서 무의식 세계로 전환된다.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심적 외상은 콤플렉스를 형성하여 장래 그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었다. 

시인들은 자기만의 감수성으로 사물과 삶을 관찰하고 또 그것을 자기만의 시어로 표현한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탓이 큰 것으로 이해되거니와, 그들이 매우 사적인 심적 외상으로 인한 충격을 시로 승화시키는 행위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실제로 불우한 환경 속에서 위안의 방편으로 시작(詩作)을 시작한 시인들일수록 '심적 외상'의 신음(呻吟)을 작품의 배경음악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앞길이 막혀 좌절했던 당나라 시인 이하는 자신의 시세계를 괴기하고 염세적으로 장식했었고, 한국의 대표시인 서정주 또한 대표작 중의 하나인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고백했었으며, 아내와 사별한 아픔과 슬픔을 시로 읊어 베스트셀러 시인이 됐던 도종환도 “좌절과 고통 없었다면 시인 못 됐을 것“이라고 토로했었다. 따지고 보면 그게 시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1989년 문학과 사상사에서 펴낸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던 중 뇌졸중으로 인해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던 시인 기형도(奇亨度: 1960 ~ 1989)도 '심적 외상'에 꽤나 시달렸던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노라면 유년의 가난과 불안과 고독이 여린 심성에 깊은 상처를 남겨 성년이 되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1989년 5월 발간된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실린 '엄마 걱정'도 '심적 외상 후 스트레스(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은 '엄마 걱정'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자기 자신 걱정, 해가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찬밥처럼 방 안에 담겨 불안에 떠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을 표출하고 있음을 본다. 아주 먼 유년의 일이었지만 성년이 되어서도 자신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는 토로가 너무 애처로워 그 때의 일이 얼마나 큰 '심적 외상'을 남겼는지를 가늠케 한다. 실제로 기형도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런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 많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 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 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위험한 家系 1969' 앞부분>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져 죽만 먹고 지내는 가운데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고 매정하게 말한다든지 스펀지 마다 숭숭 구멍 난 잠바를 입고 다니는 철부지 아들이 새것을 사달라고 조르자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라고 거절하는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바 아니지만 그로 인해 입은 상처를 평생 어루만지고 살아야할 자신의 영혼을 더 불쌍히 여기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제목을 ’위험한 가계‘라고 붙인 게 아닌지?! 

세상의 중심은 '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믿고 있다는 점 또한 상기한다면, 소통의 문이 열린다. 시를 짓고 감상하는 이유도 그런 소통의 문을 열기 위해서라는 것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시가 어쩌다 생겨난 게 아니라 원초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혼자만의 불안과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다가 발명해낸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2017년 4월 18일 화요일

꽃나무-주관과 객관 사이의 인지부조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시 찰스 강변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

                           <가톨릭 청년 2호, 1933.7, 이상(李箱: 1910~1937)>

인간이 스트레스 및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적인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속이면서 대체하는 양식을 ‘방어 기제(防禦機制, Defense Mechanism)’라고 한다. 성격발달 수준이나 불안 정도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무의식적으로 사실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킨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 중 하나가 투사(投射, Projection)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충동이나 갈등의 원인이 자신 내부에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치 자신 외부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번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선거인단 확보에서 이겨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유효 득표수에서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뒤진 것으로 나타나자 이민자나 민주당원들의 불법 투표 때문일 것이라고 우겼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보기는커녕 모든 게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음모를 꾸민 탓이라고 강변했던 한국의 박근혜 전 대통령, 자신이 못 나서 못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정치인들의 탓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촛불집회니 태극기 집회니 이런 저런 데모에 앞장섰던 사람들도 일종의 투사를 한 것이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투사를 하는 사람들은 실체보다도 그 실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을 우선한다. 그래서 생겨나는 게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Cognitive dissonance)다.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과 객관적 실체가 다르게 나타날 때 자기 정당화를 통해 양자 사이의 불일치를 제거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저런 의혹과 추문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걸핏하면 ‘위대한 미국’ 또는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고 탄핵에 이어 구속까지 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직까지도 “어떠한 경우에도 사익·사심 추구가 없었다”는 말을 자꾸만 반복하는 것도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 사람들이 인지부조화에서 벗어나려면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의 차이부터 다시 학습해야 한다는 것도 두말하면 잔소리다. 

주관은 감각하고 의식하고 사고하는 대상에 작용하는 것 즉 의식 그 자체를 말한다. 실천을 강조할 때에는 주체(主體)라고도 하는데 관념론자들은 “객관은 주관에 의하여 구성되고 주관에 좌우된다”고 여겨 주관의 우월성을 주장하지만 유물론자들은 “주관은 최고도로 조직된 물질 즉 뇌의 작용으로서 객관을 반영·모사(模寫)한다”고 폄하한다. 대상의 객관성과 배치되는 독선적이고 비과학적인 태도를 '주관적'이라고 비난하는 풍조도 거기서 생겨났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반면 객관은 주관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 즉 대상(對象)을 말한다. 관념론자들은 “객관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작용으로써 만들어진 2차적(二次的)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유물론자들은 “객관은 주관의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인식 대상이나 실천 대상이 된다”고 반박한다.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종교인이나 자기 믿음이 강한 관념론자들은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으로 인식하려고 덤벼들지만 과학자들이나 유물론자들은 자신의 믿음이나 생각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미국사회나 한국사회나 갈등이 점점 고조되는 것도 주관과 객관의 충돌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나의 주관을 객관이라고 믿으면서 너도 수용하라고 강요한다든지, 자신의 주관과 객관적 실체가 불일치할 때마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든지, 내가 수용하기 힘든 갈등이나 불안을 네 탓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시인 이상
서울 출신으로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 건축기수로 일하다가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등을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한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이라면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좀 더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1933년 3월 객혈로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요양하면서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는 이상이야말로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 보인다는 말이다. 공사장 인부들이 그의 이름을 잘 몰라 일본식으로 '리상'이라고 불러 자신의 필명을 '이상'이라고 정했다는 설도 주관과 객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거니와, 1934년 자신의 주관으로 쓴 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의 객관적인 항의로 중단해야만 했으며, 자신은 결핵을 극복하기 위해 도쿄행을 결행하였으나 얼렁뚱땅 불온사상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온 후 도쿄대 부속병원에서 병사할 때도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곰곰이 곱씹어봤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주관이 세상 사람들의 ‘주관적인 객관’에 의해 거부당할 때마다 충격을 받았던 그의 의식은 분열할 수밖에 없었을 터, 시대를 잘못 타고난 시인의 마음고생에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다. 

이상이 1933년 7월 <가톨릭 청년> 2호에 발표한 작품 ‘꽃나무’도 주관과 객관의 차이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의 표출로 보인다. 이 작품의 주제는 ‘꽃나무’가 상징하는 객관적 자아와 ‘나’가 대변하는 주관적 자아의 충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는 주관적 인식,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는 자신의 주관과는 차이를 보이는 현실의 객관적 인식, “나는막달아났소”는 그런 현실로부터의 도피,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는 인지부조화의 자각....소위 자의식(自意識)의 분열로 치닫고 있음을 본다. 자신의 주관과 객관의 사이의 고뇌를 콕 찍어내고 있음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상이 당대의 ‘천재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것도 그런 주관적인 자의식의 분열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너도 나도 남 탓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읽고 또 읽어볼 만한 시라는 생각이 든다.

2017년 4월 8일 토요일

여성에 관하여-모파상의 ‘비천한 진실’과 최승자의 페미니즘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문학과지성사), 최승자(1952년 ~ )>

프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년~1893년)이 1883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Une Vie)을 읽다보면 “도대체 인간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하느님은 어디서 자빠져 낮잠을 자고 있느냐”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착하고 청순하기 짝이 없는 노르망디 귀족의 딸 잔느는 줄리앙 자작과 결혼하지만 이내 환멸과 비애를 느낀다. 난봉꾼이었던 줄리앙은 잔느의 몸종 로잘리를 건드려 아이를 낳게 하고도 모자라 백작 부인과 간통을 하다가 발각되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또 잔느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정숙한 여인의 귀감으로 여겼던 어머니가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 남편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세상에 대해 더 없는 환멸을 느낀다. 외아들 폴에게 모든 희망을 걸어보지만 폴 마저 창녀와 함께 살면서 가산을 탕진하는 등 잔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모파상이 세상에 대한 환멸과 생에 대한 배신감, 솟구치는 비애로 뒤범벅된 그런 작품을 쓴 데 대해 사람들은 “모파상이 신경질환을 앓고 있었던 데다가 다작으로 인한 피로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인해 염세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지만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에 주목하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은 다르다. 모파상이 여성의 일생을 남성의 시각으로만 관찰했기 때문에 여자의 불행조차 ‘남자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모파상 자신은 여권의 시장을 위해 그런 작품을 썼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기실은 여자의 일생이 남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강조한 지독한 성 차별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일견 틀린 지적은 아닌 것 같다. 여성차별을 하지 않으려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시각이나 사회적 편견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모파상 살아생전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돋보기를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의 일생’이라는 소설또한 페미니즘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1883년 모파상이 한 잡지에 발표한 후 단행본으로 엮어진 게 일본에 소개될 때 ‘여자의 일생’이라고 번역됐고 그걸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이 고스란히 베껴 한반도에 소개함으로써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 원제는 ‘Une vie’ 또는 ‘L'Humble Vérité’로서 ‘어떤 인생’ 또는 ‘비천한 진실’이었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비천한 진실’ 사이의 거리는?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나온 후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최승자(1952년~ )에게 물어보면 “가깝고도 멀다”는 아리송한 답변을 내놓을 것 같다. 등단하자마자 드물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던 최승자는 등단 초기 당시 한국사회의 흐름과 맞물려 페미니즘을 시작의 주제로 삼았었다. 지금도 한국문단에서는 페미니즘을 논할 때마다 ‘최승자’라는 이름을 빠짐없이 등장시킨다. 그러나 최승자의 페미니즘은 80년대 당시 한국사회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던 바,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즉 남성 우위 사회에 대한 반동적인 페미니즘을 내세울 때 최승자는 남성이라는 거울에 비춰본 여성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여성성을 확인하려고 시도했었다. 최승자의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년, 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작품 ‘여성에 관하여’에도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죽음과 탄생, 죽음은 수정되지 않은 난자(卵子)의 종말, 탄생은 수정되어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태아, 여자의 몸이 삶과 죽음의 발원(發源)이라는 통찰로 여성성의 근원(根源)을 찾고 있음을 본다. 여성성이야말로 인간의 모태이자 삶과 죽음의 뿌리라는 것이다.

201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최승자의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모파상의 ‘비천한 진실’과 최승자의 ‘여성에 관하여’ 사이의 거리는? 역시 가깝고도 먼 것 같다. 남성의 눈으로 여성의 삶을 관찰했던 모파상은 인간의 삶에 대해 지독한 회의를 느껴 자살을 시도한 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1893년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여성의 눈으로 여성성을 관찰했던 최승자 또한 2001년 이후 정신분열증으로 시달려오면서 육체적으로는 집과 병원을 오가고 정신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지난 해 자신의 근황을 담은 새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건재(?)함을 알렸지만 페미니즘은 썰물처럼 빠져나고 그 빈자리를 생에 대한 관조로 채우고 있음을 본다. "나는 죽은 시계/세계가 노자 時 장자 分에 멈춰 있다/장자가 無라면 노자는 虛다/장자가 소설가라면 노자는 시인이다/꽃잎들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보인다"('죽은 시계' 전문)라는 작품에서 보듯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슨 생각을 하다가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았다는 듯이 페미니즘도 삶의 아픔과 슬픔과 고뇌도 초월하려고 애쓰고 있는 게 뚜렷이 감지된다. 

'여성' 최승자보다는 '시인' 최승자로 바라보고 싶다. 최승자 또한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활동해왔지만 결국은 인간 아무개로 회귀하는 건 아닌지?! 그게 여자가 아닌 인간의 ‘비천한 진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자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고독과 불안과 슬픔이 크다.